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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학 초감각적 세계 인식과 인간 규정성에 관하여(GA9)나의 서재 2025. 10. 6. 11:47반응형
감각 세계를 벗어나는 길을 찾는 사람은, 인간 삶이 다른 세계를 인식할 때만 가치와 의미를 얻는다는 것을 머지않아 이해하도록 배운다. 이 인식을 통해서야 비로소 사실상의 인생에 두 발을 단단히 딛고 서기를 배우기 때문이다. 초감각적 세계를 인식하는 사람은 인생의 원인을 알아보게 된다. 반면에 이 인식이 없으면 맹인처럼 효과만 더듬거리며 그 사이를 지나갈 뿐이다. 감각적인 '실재'는 초감각적인 것을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그 의미를 얻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인식을 통해 인생에서 실용적으로 되지 무능해지지는 않는다. 삶을 이해해야만 진정으로 '실용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
지상의 인간의 일곱 구성체
1. 육체
2. 에테르체 혹은 생명체
3. 감지하는 영혼체(아스트랄체)
4. 오성영혼(영혼 핵심으로서 나)
5. 정신으로 채워진 의식영혼(변화된 아스트랄체로서 정신자아)
6. 행명정신(변화된 생명체로서 생명정신)
7. 정신인간(변화된 육체로서 정신인간)
1~3 구성체는 무상한 이 세상에 속하고, 4~7 구성체를 통해서는 영원한 세계에 뿌리내고 있다.
인식의 길
인간은 사고에서 출발할 때만 인식을 향한 자신의 길을 발견할 수 있다. 진지하게 사고내용을 작업하는 것이 고차적인 인식능력을 양성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필수적인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충분치 않다.
고차적 사실에 대한 자신의 관조에 도달하려는 사람이 내면에 양성해야 하는 첫 번째 자질은 인생이나 외부 세계가 보여 주는 것에 가차 없고 편견 없이 몰두하는 것이다. 인생에서 지금까지 배운 편견을 가지고 세상에 있는 사실을 대하는 사람은 바로 그 편견으로 인해 사실이 그에게 행사할 수 있는 잔잔하고 전반적인 작용을 알아보지 못한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매 순간 자신을 완전히 빈 그릇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낯선 세계가 그 그릇으로 흘러든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모든 편견과 비판이 침묵하는 바로 그 순간만 인식의 시간이다. 인간이 고차적 인식의 길에 들어서기를 바란다면, 매 순간 모든 편견과 함께 자신을 삭제할 수 있도록 수련해야 한다. 자신을 완전히 삭제하는 한에서만 다른 것이 내면으로 흘러든다. 고도의 경지에 도달한 완벽하게 무욕적인 몰두만 인간 주변 어디에나 널려 있는 고차적, 정신적 사실을 받아들일 능력을 준다. 이 능력은 인간이 목표를 의식하면서 내적으로 양성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가능한 한 자신의 판단을 억제하도록 노력한다. 그 사람을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그 자체 그대로 이해해 보려고 노력한다. 최상의 수련은 극히 싫어하는 사람을 그런 태도로 대하는 것이다. 자신이 사물이나 사건에 관해 말하기보다는, 그것들이 자신에게 말하도록 둔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사고내용 세계로까지 확장시킨다. 이러저러한 생각을 만들어 내는 것을 내면에서 억제하고, 외부에 있는 것이 사고내용을 야기하도록 둔다. 인내심을 가지고 아주 경건하고 진지하게 그런 수련을 해야지만 고차적 인식 목표에 이를 수 있다.
배우려는 사람은 대상과 인간을 그 자체적 특성에 따라 대하는 자질을, 그 자체적 의미와 가치에 따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자질을 양성해야 한다. 공감과 반감, 호불호가 완전히 새로운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공감이나 반감 같은 느낌을 뿌리재 뽑아버리고, 그에 대해 무뎌져야 한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와 정반대다. 솟아나는 공감과 반감에 따라 즉각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지 않는 능력을 더 많이 발달시키면 시킬수록, 내면에 훨씬 더 섬세한 감지력이 양성된다.
인간이 모든 기쁨과 고통에, 모든 공감과 반감에 더 이상 이기적으로 응하지 않고, 더 이상 이기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아야 외부 세계에서 오는 변덕스러운 인상에도 더 이상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인간이 한 대상에서 기쁨을 느끼면, 이 기쁨은 즉시 그를 그 대상에 의존하게 만든다. 사람이 대상에 빠져들어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변덕스러운 인상에 따라 기쁨과 고통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정신적 인식의 길에 들어설 수 없다. 기쁨이든 고통이든 의연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더 이상 그런 것들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비로소 그것들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내가 기쁨에 빠져있으면, 바로 그 순간에 그 기쁨이 내 현존을 갉아먹는다. 그런데 나는 그 기쁨을 이용해야 할 뿐이다. 이는 나한테 기쁨을 주는 대상을 바로 그 기쁨을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떤 대상물이 나를 기쁘게 하는지, 그것이 나한테 중요해지면 안 된다. 나는 기쁨을 경험해도 된다. 그리고 바로 그 기쁨을 통해서 대상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기쁨은, 나한테 그런 기쁨을 주기에 적절한 특성이 대상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역할을 해야 할 뿐이다. 나는 바로 그 특성을 알아보고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저 기쁨에 머물러 있기만 한다면, 그 기쁨의 포로가 되고 마는 셈이다. 정신 연구가에게 공감과 반감, 기쁨과 고통 등은 대상에 대해 배우는 기회가 되어야 할 뿐이다. 예전에는 외부에서 오는 인상이 행복하거나 불행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그에 대응해 이러저러한 행위를 했다. 이제는 기쁨과 고통, 공감과 반감 등을 기관이 되도록 하고, 이 기관을 통해 대상 자체가 그 본질에 따라 어떠한 것인지 말하도록 한다. 눈은 감각적 인상을 받아들이는 통로 격의 기관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육체에 쓸모가 있다. 이와 유사하게 기쁨과 고통이 자체적인 어떤 것으로 더 이상 자리잡지 않으면 영혼의 눈으로 발달되고, 내 영혼에 다른 사람 영혼을 보여 주기 시작한다.
올바른 것이라 인식한 어떤 일을 시작했다면, 그 일에서 자신의 사적인 느낌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들어선 길을 떠나서는 안 된다. 그런 반면에 그렇게 들어선 길이 영원한 아름다움과 진리의 법칙에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본다면, 비록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해도 계속해서 그 길을 가서는 안 된다.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충족시키는 것, 자기한테 이득이 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 어떤 행위를 할 것인지 결정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개인적 방향을 세계 현상의 과정에 강요하고 떠맡기는 것이다. 이들은 정신세계의 법칙 속에 확정되어 있는 진리를 구현하지 않는다. 인간은 오로지 정신세계 법칙을 따를 때만 비로소 정신세계의 의미에서 작용한다. 단순한 개인적 성향을 바탕으로 하는 것에서는 정신 인식을 위한 근거를 구축하는 힘이 전혀 생겨나지 않는다. 인식을 구하는 자는 "무엇이 내게 이득이 될 것인가? 무슨 일로 내가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무엇을 선한 일이라고 알아보았는가?" 하는 질문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로써 감각 세계가 얽어매는 모든 강제성에서 해방되고, 그의 정신인간이 감각적 껍데기를 벗어나 고양된다. 이렇게 정신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고, 이렇게 스스로를 정신화한다. 다음과 같은 질문은 무의미하다. "내가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 오판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순수하게 진리의 법칙만 따르려는 그 모든 의도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요지는 추구와 노력, 의향 자체에 있다. 미혹에 빠진 사람이라 해도 진리를 추구한다는 그 의향 속에는 한 가지 힘이 들어 있다. 바로 이 힘이 잘못된 길을 벗어나도록 한다. 어떤 사람이 미혹의 길에 들어서면, 바로 이 힘이 그를 장악해서 올바른 길로 데려간다. 잘못된 길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 자체가 이미 걸림돌이 되는 불신이다. 이기적인 인간 의지는 진리에 명령할 수 없다. 진리 자체가 인간 내면에서 통치자가 되어야 하고, 인간 존재 전체를 관통해야 하고, 인간을 정신들의 나라에 있는 영원한 법칙을 모사하는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
내가 돌멩이 하나를, 나무 한 그루를, 동물 한 마리를, 한 인간을 관찰하면, 그 모든 존재 속에서 영원한 것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유념할 수 있어야 한다. "언젠가는 사라질 돌멩이 속에,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날 인간 내면에 과연 무엇이 영구한 것으로서 살고 있는가?" 이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 덧없는 감각 현상과 함께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인가?" 정신이 그렇게 영원한 것에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일상생활에 있는 특성을 알아볼 감각이 말살되어 그것을 집중해서 고찰하지 않을 것이라고, 인간이 직접적인 실재에서 멀어질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그와 정반대다. 육체의 눈으로만 보지 않고 그 눈을 통해서 정신이 집중하면 나뭇잎 하나, 작은 풀벌레 한 마리조차 우리에게 무수한 비밀을 풀어놓을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멀리 나아가는지, 그것을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다. 우리는 올바른 것을 해야 할 뿐이고, 나머지 모두는 발달에 맡겨야 한다. 영원한 것 쪽으로 우리의 감각을 향한다면, 이로써 일단을 충분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내면에서 영원한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주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할 뿐이다. 그리고 적당한 시기가 오면 참을성 있게 기다리면서 노력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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