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있는 그대로 Be As You Are (David Godman)
    나의 서재 2024. 10. 19. 18:39

     

    있는 그대로 Be As You Are (David Godman)

    라마나 마하르쉬와의 문답 등의 기록을 발췌하여 만든 책으로 상당히 깊은 감명을 받았다.

    라마나 마하르쉬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다.


    Q: 에고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A: 에고란 없다. 만약 에고가 있다면 자신이 둘이라는 말이 된다. 에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지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 진리를 궁구해보면, 결국 무지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으므로 찾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막상 무지를 찾아보니 도망가 버렸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무지는 에고의 부속물일뿐이다. 왜 당신은 있지도 않은 에고를 생각하며 괴로워하는가? 무지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보라. 무지는 존재하지 않지만, 세속의 삶은 무지가 있다는 전제하에 살도록 강요한다. 무지란 말 그대로 모르는 것일 뿐이다. 무지란 <나>를 모르거나 잊어버린 것이다. 햇빛이 비치는 곳에 어둠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자명한 <나>, 스스로 빛을 발하는 <나> 앞에서 무지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나>에 대해 알게 되면 어둠도 없고, 무지도 없고, 불행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불행이나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마음이다. 어둠은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태양을 보면 태양에 어둠이 없음을 알 수 있듯이, <나>를 깨닫게 되면,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무지가 없음을 알게 된다.

    우리의 참된 본성은 해탈이다. 우리는 실상 언제나 자유롭지만, 속박되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온갖 방법을 써서 자유로워지려고 발버둥을 친다. 하지만 당신이 해탈의 단계에 이르고 나면, 내 말에 무릎을 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미 그런 존재로 살아왔고, 이미 그런 존재로 현존하고 있으면서 이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그토록 정신없이 발버둥 쳤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본래 자유롭다면, 우리는 왜 구속되어 있다고 느끼겠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거꾸로 이렇게 반문하겠다. "방 안에 가만히 머무르고 있으면서도, 당신들은 왜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고 사막을 헤매며 험난한 여행을 하고 있다는 공상에 빠져 있는가? 모두 마음이 만들어 낸 환상(maya)일 뿐이다."

    Q: 마음의 속박은 왜 이리도 끈질긴가?
    A: 속박의 본질은 '실체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존재'라는, 파괴적이며 그릇된 생각일 뿐이다. 아무도 실체에서 분리된 상태로는 존재할 수 없으니, 그런 생각이 날 때마다 뿌리치도록 하라.

    Q: 이런 진리를 듣고도 왜 마음이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은가?
    A: 습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습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 한 의심과 혼란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이 의심과 혼란을 없애려면 그 뿌리를 완전히 뽑아내야 하며, 거기에 모든 노력을 쏟아 부어야 한다.
    의심과 혼란의 뿌리가 바로 습이다. 습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면, 스승의 가르침을 받으며 수행해야 한다. 스승은 제자 스스로 "무지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도록 도와줌으로써 제자의 습을 제거한다. 습을 없애는 첫 번째 단계는 진리를 경청하는 것이다. 진리를 듣고도 확실하게 이해되지 않으면 내면을 성찰하는 수행을 해야 하며, 명상에 몰입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 두 과정을 거치면서 습은 차츰 시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습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은 진리를 한번 듣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을 얻는다. 이런 사람들은 앞서나가는 수행자다. 하지만 처음 수행하는 사람들은 보통 오랜 시간을 수련해야 깨달음을 얻는다.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질문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만은 인정해야 한다. 존재 자체가 바로 <나>이며, <나>는 이미 깨달은 상태다. 그러므로 당신이 깨닫고자 노력하면 할 수록 '<나>를 깨닫지 못했다'고 착각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음을 통렬히 깨닫게 될 것이다. 새롭게 깨달아야 할 것은 없다. <나>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뿐이다.

    우리는 "<나>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라며 <나>를 찾아 이리저리 방황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지견(올바르게 보는 지혜)의 서광이 비추고서야 "<나>가 바로 나였구나!"하고 알아차린다. 우리는 그러한 '지견'을 얻어야 한다. 일단 지견을 얻고 나면 세속에 뒤섞여 살더라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신발을 신은 사람은 길바닥에 아무리 돌이나 가시가 많다고 해도 발에 상처입지 않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지견을 얻는 사람에게는 세상만사가 자연스러울 뿐이다. <나>와 분리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Q: 깨달은 사람에게는 '육체가 나라는 생각' 자체가 없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예를 들어 스승께서는 벌레에 물려도 아무런 감각이 없는가?
    A: 감각도 있고, '육체가 나'라는 생각도 있다. 그런 의식은 깨달은 사람에게나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나 모두 다 있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육체만을 '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모든 것이 <나>, 즉 브라만(Brahman)임을 안다. 그러므로 고통이 있어도 그냥 내버려둔다. 고통 또한 <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나>는 완전하다.
    '육체가 나'라는 생각을 넘어서야 참나를 깨닫는다. '육체나 나'라는 의식이 사라지면, 행위도 행위하는 자도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깨달은 사람에게는 카르마가 없다. 다시 말해 깨달은 사람은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깨달은 사람의 체험이며, 이런 체험이 없다면 깨달은 것이 아니다.

    Q: 마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A: 마음은 '나라는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과 에고는 하나이며 똑같다. 지성이나 기억 따위의 다른 정신적인 기능들도 역시 마음이다. 마음, 지성, 습의 저장소, 에고 등도 모두 마음이다. 이는 같은 사람을 두고 그 역할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개체적 영혼 역시 마음이나 에고일 뿐이다.

    Q: 명상도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효과적인 방편이 아닌가?
    A: 명상은 어떤 대상을 향해 집중하는 것이다. 따라서 잡다한 생각을 물리치고 마음을 한 생각에 고정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그 한 생각마저도 사라져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깨달음이란 없던 것을 새롭게 얻는 게 아니다. 깨달음은 늘 존재하고 있지만 단지 생각이라는 막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막을 걷어내는 데에 모든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 실재를 가리고 있는 막을 걷으면 깨달음은 저절로 드러난다.
    구도자에게 명상을 하라고 권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만족하여 돌아간다. 하지만 몇몇은 다시 돌아와서 되물을 것이다. "어떤 대상에 대해 명상을 하는 나는 대체 누구입니까?"라고 말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 <나>를 찾으라고 말한다. 이것이 마지막 단계인 자기탐구다.

    Q: 그렇다면 명상을 하지 않고, 자기탐구만 해도 되는가?
    A: 자기탐구는 과정이자 목표다. '나는 존재한다'가 목표이며, 궁극적인 실체다. '나는 존재한다'를 놓치지 않는 노력이 곧 자기탐구이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자기탐구가 이루어지면 깨달음이 온다.
    가장 효과적인 수행법인 자기탐구를 빼고는, 마음을 온전히 다스리는 다른 방법은 없다. 설령 다른 방법으로 마음을 다스린다손 치더라도, 마음이 가라앉은 것 같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부르르 일어난다. 자기탐구는 조건 없는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당신 자체를 깨닫는 가장 확실하고 직접적인 방법이다.

    Q: 자기탐구가 다른 방법보다 직접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A: 언제나 '나'로서 빛을 발하며, 대상과 객체로 분리되지 않는 순수한 실체인 <나>에 대한 주시만이 '이 몸이 나'라는 미망에 현혹된 사람이 끝없이 태어나고 죽는 '윤회의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유일한 뗏목이기 때문이다.
    실체는 에고가 없는 상태일 뿐이다. 에고의 정체를 파악하여 에고를 없애라. 에고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저절로 사라질 것이며, 실체가 스스로 빛을 발할 것이다.
    이 수행법이야말로 에두르지 않는 직접적인 방법이다. 이에 반해 다른 수행법들은 에고를 유지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다른 수행법을 따르다보면 수많은 의심이 생기는 데에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영원한 질문이 마지막까지 고스란히 남는다. 그러나 자기탐구는 처음부터 '나는 누구인가?'라는 마지막 질문 하나로 시작한다. 이 질문에 대해 탐구하는데는 다른 수행법이 필요없다.
    우리 자신이 이미 실체이면서도 실체를 찾으려고 한다는 이 사실보다 더 큰 신비는 없다. 우리는 무언가가 실체를 가리고 있으며, 실체를 깨닫기 위해서는 그것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스꽝스러운 노릇이다. 언젠가 과거의 노력을 돌이켜보며 웃음을 터뜨릴 날이 올 것이다. 당신이 웃게 될 그날에 존재할 그것이, 지금 여기에,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자기탐구 -수행>
    스리 라마나는 자기탐구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나'라는 내면의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고, 가능한 한 그 느낌을 오랫동안 유지하라고 일렀다. 또한 다른 생각 때문에 집중력이 분산되면 '나라는 생각'을 알아차리는 데에 마음을 집중하고, 마음이 산란해질 때마다 다시 '나라는 생각'으로 되돌아가서 탐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이런 과정에 도움이 되는 여러 수행 방편을 제시했다. 예컨대, 탐구자가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든지 '나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라고 자문해보도록 했다. 이런 질문의 궁극적인 목적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의 주체라고 여기는 '나'를 끊임없이 알아차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자기탐구 수행의 초기 단계에서는 '나'라는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하나의 생각 또는 지각의 형태를 띤 정신적인 행위가 된다. 하지만 수행이 진전되면서 차츰 주관적으로 경험되는 '나'라는 느낌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나라는 느낌'이 다른 생각이나 대상과 연결되어 스스로를 그 생각이나 대상이라고 여기는 '동일시'를 멈추면, 그 느낌마저도 사라진다. 이때 개체성에 대한 느낌이 일시적으로 정지되고 '존재에 대한 체험'만이 남게 된다.
    이런 종류의 체험은 처음에는 드문드문 일어난다. 하지만 수행을 거듭함에 따라 그 상태에 이르거나, 그 상태를 유지하기가 점점 더 쉬워진다. 자기탐구가 이 정도 수준에 이르면, 애쓰지 않고도 존재를 자각하게되며 더 이상 개인의 노력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왜냐하면 노력하던 '나'가 일시적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 단계에 도달해도 '나라는 생각'이 주기적으로 다시 나타나기 때문에, <나>를 깨달았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수행의 최고 단계인 것만은 분명하다.
    수행을 하면서 '존재에 대한 체험'이 반복해서 일어나다 보면,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습(마음의 습성)이 차츰 약해지고 마침내는 소멸한다. 습의 구속력이 일정 수준 이하로 약해지면, <나>의 힘이 남아 있는 '습'들을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나'라는 생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이 상태가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는 궁극의 깨달음이다.
    '나라는 생각'을 주시하거나 알아차리는 수행법은, 생각을 어딘가에 묶거나 고정시켜서 제어하는 대개의 수행법에 비해 조화로운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수행법은 특정 대상에 생각을 묶지도 않고, 생각을 억누르지도 않으며, 그저 마음이 일어나는 근원에 대한 주의를 일깨우기만 하면 된다.
    자기탐구의 수단이자 목적은 마음의 근원에 머무는 것이며, 실체가 아닌 것들에 대한 관심이나 이끌림을 거두어들여서 유일한 실체를 알아차리는 데 있다. 수행의 초기 단계에서는 들끓는 온갖 생각들로부터 '생각하는 자신'에게로 주의를 돌리는 데 꽤나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일단 '나'라는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이 확실하게 자리 잡으면, 그 뒤부터는 더 이상의 노력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 이때부터는 행위의 과정이 아니라 존재의 과정이며, '존재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 아니라 '애쓸 필요없이 존재하는' 과정이다.
    원래부터 우리는 애쓰지 않고도 존재하는 실체로서 늘 현존하고 있으며, 그것을 스스로 늘 체험하고 있다. 하지만 몸과 마음처럼 실재하지 않는 것이 현존하는 척 가장을 하려면, 잠재의식 차원에서 끊임없이 정신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자기탐구 수행이 고차원적인 단계에 이르면, 노려을 하면 할수록 존재를 체험하는 데에 방해가 되며 오히려 노력을 그쳐야 존재를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궁극적으로 <나>는 어떤 행위를 한 결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존재함으로써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스리 라마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명상하지 말고, 존재하라!"
    "스스로가 누구인지 생각하지 말고, 존재하라!"
    "존재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 당신은 그냥 존재한다!"
    자기탐구를 마치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치르는 명상 수행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깨어 있는 동안, 어떤 일을 하든지 자기탐구는 계속되어야만 한다. 스리 라마나는 일과 자기탐구가 절대 서로 상충하지 않으며, 실제로 조금만 해보면 어떤 상황에서도 쉼 없이 할 수 있게 된다고 강조했다. 물론 초보 단계에서는 한시적으로나마 시간을 정해 놓고 규칙적으로 하는 것도 좋을 거라고 말하기는 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앉아서 명상하는 방식을 결코 권하지 않았다. 또한 제자들이 세속의 생활을 정리하고 명상에만 전념하겠다고 나설 때면 언제나 만류했다.

    자기탐구를 통해 마음이 내면을 파고들어 '나라는 생각'의 근원으로 향하면, 차츰차츰 저절로 습이 소멸된다. 그런데 <나>의 빛이 습에 비쳐 반사되는 현상이 곧 마음이다. 따라서 습이 사라지면 마음 또한 사라진다. 마음은 유일한 실체인 가슴(<나>의 또 다른 표현)의 빛 속으로 녹아들고, 사라져버린다.
    이것이 구도자들이 알아야 할 핵심적인 내용이다. 구도자들은 모름지기 '나라는 생각'의 근원을 온 마음을 다해 일념으로 탐구해야 한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는 관념을 버려라. 고요해지기만 하면 <나>를 깨닫는다. 이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나>를 깨닫는 것이다.
    세상에서 면밀히 탐구해볼 만큼 알 가치가 있는 지식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 대한 진리다. 이것을 관심을 가져야 할 목표로 삼아, 가슴에서 맹렬하게 깨달아야 한다. 날뛰고 괴로워하는 마음의 활동에서 벗어나, 의식이 고요하고 정청해져야만 자신에 대해 알 수 있다.

    Q: 순명(자기 삶의 모든 권한을 신 또는 <나>에게 완전히 맡기는 법)만으로도 <나>에 이를 수 있는가?
    A: 물론이다. 순명하는 것만으로도 <나>에 이를 수 있다. 순명이란 자신이 존재하게 된 근본 원인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그 근원이 자신의 외부에 있는 어떤 신이라는 미망에 빠지지 말라. 당신의 근원은 당신 안에 있다. 그 근원에 자신을 맡겨라. 이 말은 그 근원을 찾아서 그 속에 녹아들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Q: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실제로는 신이 하고 있다는 것인가?
    A: 지금 당신은 행위자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문제에 빠져 있다. 그것은 착각이다. 보다 높은 힘이 모든 행위를 하고 있으며, 인간은 단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태도를 받아들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고통을 자초한다.

    Q: 스승이 자신에게 맞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스승의 진면목(참된 본성, 참된 모습)은 무엇인가?
    A: 서로 마음이 잘 맞는 스승이 당신에게 적합한 스승이다. 그는 평정, 인내, 관용 등의 미덕을 갖추어야 한다.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당기듯이 눈빛만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어야 하며, 만물을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
    이런 덕을 갖춘 이가 스승이시만, 스승의 참된 모습을 알고 싶다면 먼저 자기 자신의 진면목을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의 참된 본성도 모르는 사람이, 스승의 참된 본성을 어떻게 알겠는가? 스승의 참된 성품 또는 참 모습을 알고자 한다면, 먼저 우주 전체를 스승의 모습으로 보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 속에서 스승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든 대상에서 신의 모습을 발견해야 한다. 하지만 <나>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신의 참모습이나 스승의 참모습을 알아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먼저 자신의 참모습과 본성을 알도록 하라.

    Q: 하던 일을 그만두고, 스승과 늘 함께하고 싶은 바람을 가지고 있다.
    A: 스승은 늘 당신 곁에, 당신 안에 있으며, 당신 자신이 스승이다. 이것을 깨닫기 위해 하던 일을 그만두거나 집에서 도망칠 필요는 없다. '출가'란 세속에서 입던 옷을 벗고, 가족과 관계를 끊고, 집을 떠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욕망과 애정과 집착을 버리는 것을 뜻한다. 직업을 버릴게 아니라 모든 짐을 대신해서 지는 신 앞에 자신을 버려라.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마음 바탕에 주의를 기울여라. 단, 그러기 위해서는 서두르지 말고 여유를 가져야 한다. 일을 하는 중이라고 하더라도 당신의 참된 본성이 살아 있음을 기억하고 서두르지 마라. 서두르면 참된 본성을 잊어버리게 된다. 또한 신중해져라.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명상하고, 마음의 활동을 주관하는 <나>와의 관계를 알아차리도록 하라. 당신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일을 하고 있는 것은 근원적인 흐름이라고 여기고, 자신 또한 그 흐름이라고 여겨라. 서두르지 않으며 항시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일을 한다면, 일이나 사업은 수행에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는다.

    Q: 수행 초기 단계에서는 인생에 주어진 외부적인 의무를 버리고, 홀로 지내는 시간을 갖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A: 수행을 위한 버림 또는 포기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가정을 버리고 숲이나 은둔지로 들어간다든지,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핵심은 마음이 외부로 향하지 않고 내면으로 향하도록 살피는 것이다. 수행처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든 말든, 또는 자신의 의무를 등지든 말든, 그런 것은 정말로 중요하지 않다. 이 모든 일은 운명에서 정해진 대로 일어난다. 육체가 어떤 행위를 할지는 태어날 때부터 결정된다. 당신이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음을 자신의 내면으로 돌려, 거기에서 일체의 행위를 버리는 것이다.

    Q: 수행을 할 때는 어떻게 먹어야 하는가?
    A: 음식은 마음에 영향을 준다. 올바른 음식을 먹으면 마음이 더욱 순수해진다. 어떤 수행을 하든지 채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Q: 깨달은 사람도 음식에 대한 제약이 있는가?
    A: 아니다. 깨달은 사람은 음식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음식에 상관없이 한결같다.

    Q: 육류를 재료로 삼아 음식을 준비하려면, 살생을 해야 하지 않는가?
    A: 불살생(ahimsa)은 수행자가 지켜야 하는 첫 번째 계율이다.

    Q: 호흡을 다스릴 필요가 있는가?
    A: 조식(호흡 다스리기)은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도 내면에 깊이 들어갈 수 있다. 마음이 다스려지면 호흡도 저절로 다스려진다. 그러므로 굳이 호흡을 다스리려 할 것 없이, 마음을 다스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호흡 다스리기는 자신의 마음을 곧바로 다스릴 수 없는 사람에게만 권하는 방법이다.

    Q: 호흡을 다스림으로써 마음이 가라앉아도 역시 그때뿐이지 않는가?
    A: 그런 경우, 마음의 고요함은 호흡을 다스리는 동안만 유지된다. 따라서 그것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호흡 자체를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조식은 지감, 집중, 선정과 삼매로까지 계속해서 이어져야 한다. 이 각각의 단계들은 모두 마음을 다스리기를 다루는데, 호흡 다스리기를 먼저 수련한 사람들은 더 높은 단계로 한결 쉽게 나아갈 수 있다. 어떤 수행을 하더라도 보다 높은 단계에서는 주로 마음 다스리기를 하기 때문에, 마음 다스리기가 요가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수행이 어느 정도 진전된 사람이라면 '호흡 다스리기'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마음 다스리기'를 바로 시도하는 편이 낫다.

    Q: 조식은 들숨, 날숨, 멈춤으로 되어 있는데 이 셋을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가?
    A: 숨을 내쉬면서 자신이 육체와 같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는 것이 날숨이다. 들숨은 숨을 들이마시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탐구를 통해 내면에 몰입하는 것이다. 멈춤이란 숨을 멈추고 '내가 그것'인 유일한 실체로서 머무르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조식이다.

    자기탐구를 계속하면 질병도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마음의 건강을 위해서 육체의 건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계속한다면, 육체를 돌보는 일에서 죽을 때까지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를 깨달은 현자는 <나>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돕는다. 세상에 봉사하는 최선의 길은 에고가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만약 세상을 돕고 싶은데 에고가 사라진 상태에 이르는 것만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면, 자신의 문제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신에게 맡기고 순명하라.

    Q: 깊은 잠과 마음이 가라앉은 상태 그리고 삼매는 각각 어떻게 다른가?
    A: 깊은 잠에서는 마음이 가라앉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며, 잠깐 가라앉았다가 다시 나타날 수 있다. 명상을 해도 마음을 일시적으로 가라앉힐 수는 있지만 역시 다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완전히 소멸했다면, 그것은 다시 나타날 수 없다. 수행자라면 마음을 없애려고 노력해야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해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마음을 없애려면, 마음이라는 게 <나>와 별개가 아님을 알아차려야 한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알아차려라. 일상생활 속에서 하지 않는다면, 언제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그 행위를 일으키는 마음이란 실재하지 않으며, <나>로부터 일어나는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것이 마음을 소멸하는 길이다.

    과거(전생)의 오랜 수행을 통해 정신적으로 충분히 성숙한 사람들에게는, 무상삼매가 물밀듯이 갑자기 찾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밖의 사람들은 꾸준한 수행을 통해 걸림돌이 되던 생각들이 점차 없어져 '나'에 대한 순수한 자각의 스크린이 드러나는 때가 되면 무상삼매에 이른다. 여기에서 한걸음 더 수행해 나가면, 그 스크린이 영원히 드러나며 다시는 사라지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나>를 깨닫는 것이며, 애씀 없이 자연스러운 상태의 본연삼매다. 단순히 현상계에 대한 차별을 지각하지 못하는 것은 굳건한 무상삼매의 진정한 본질이 아니다. 즉, 마음이 죽어 차별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만이 진정한 무상삼매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욕망을 없애는 적절한 방법은 '누가 이 욕망을 가지고 있는가? 이 욕망의 근원은 무엇인가?'를 탐구하여 찾는 것이다. 그 근원을 찾아내면 욕망은 뿌리가 뽑혀 다시는 일어나지도 않고 자라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먹거나 마시거나 잠자거나 용변을 보는 등의 사소한 욕망은, 비록 욕망으로 분류하긴 하지만 안심하고 해소해도 되는 것들이다. 그런 행위들은 삶을 유지해 나가는 데에 꼭 필요한 것들이며, 새로운 습이나 경향성을 만들지도 않고 남기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어떤 욕망을 충족시키더라도 마음에 새롭게 습을 형성하여 그 욕망을 더 자라게 하지 않는 것이라면, 충족시켜도 해가 되지 않는다.

    Q: 명상 수행에서 수행자가 깨달음을 향해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 같은 것은 없는가?
    A: 원하지 않은 생각들로부터 자신이 얼마나 자유로워졌는지 그리고 한 가지 생각에 얼마나 오래 그리고 충분히 집중할 수 있는지가 수행의 진전을 가늠하는 척도다.

    창조에 관한 과학적, 신학적 이론들은 죄다 모순투성이다. 그런 이론들이 숱하게 만다는 점 자체가 그런 이론을 탐구하는 게 쓸모없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런 설명들은 관념적이거나 지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전히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그 이론들은 모두 진실이다. 깨달음의 상태에서 창조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동안에는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가 자기(참나)를 보게 되면 더 이상 세상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자기(참나)를 봄으로써 창조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도록 하라.

    Q: 당신은 가끔 환영(maya)과 실체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A: 상카라는 이렇게 말했다.
    1. 브라만은 실재한다.
    2. 우주는 실재하지 않는다.
    3. 그리고 우주는 브라만이다.
    이 말은 즉, 우주가 참나로 인식되면 실재하지만, 참나와 별개로 인식되면 실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이유로 환영과 실체는 같다고 하는 것이다.

    Q: 그렇다면 현상계가 실제로는 환영이 아니라는 이야기인가?
    A: 구도자의 수준에서는 '현상계는 환영'이라고 말해야 한다. 달리 방법이 없다. 사람들은 자기가 실재하며, 온 우주에 두루 편재하는 영원불멸하는 브라만임을 망각하고, 덧없이 사라지는 육체들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자신도 육체인 양 미혹되어 있다. 그 환영에서 허덕이고 있는 사람에게는 현상계가 실재하지 않는 망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일깨워주어야 한다. 왜 그런가? <나>를 망각한 사람은 자신의 바깥에 있는 '물질적 우주'만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의 바깥에 있는 물질적 우주가 실재하지 않는 것임을 강하게 일깨워주지 않는다면, 그는 절대로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려 성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일단 <나>를 깨닫고 나면, <나>가 아닌 것은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런 의미에서 온 우주를 브라만으로 볼 것이다. 우주는 <나>없이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이 삼라만상의 원천인 <나>를 보지 못하고, 외부 세계를 실재하며 영원하다고 본다면, 그 사람에게는 바깥에 보이는 우주가 환영에 불과하다고 말해주어야만 한다. 달리 어쩔 도리가 없다.

    지고한 참나의 자리에서 보면, 거울에 비친 신기루 같은 이 세상에서 태어난다는 환상은, 육체를 '나'라고 여기는 에고의 무지에 불과하다. 마음이 자기(참나) 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태어나고 죽을 것이며, 죽으면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죽어버린 사람들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지고의 실체를 알았기 때문에, 탄생도 죽음도 없는 드높은 실체의 상태에 머문다.
    무지한 사람들은 <나>를 망각하고 육체를 <나>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셀 수 없이 태어나고 죽는 일을 반복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나>를 알고 스스로가 참나가 되면,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꿈에서 깨어난다.
    하지만 진실은 이렇다. 탄생도 없고, 죽음도 없다. 경전에는 이런 저런 설명들이 나오지만, 우리는 늘 실재하는 자로 남아 있다. 이것만이 유일한 진리다.
    Q: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탄생과 환생은 결국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A: 탄생이 있다면 한번 환생할 뿐 아니라 계속 환생해야 한다. 당신은 왜, 어떻게 해서 이번에 태어났는가? 당신은 똑같은 이유 때문에, 똑같은 방식으로 계속 나고 죽는 것을 반복해야만 한다.
    그러나 태어난 자가 누구인지 탐구하고, 태어나고 죽는 것이 당신인지 아니면 당신과 상관없는 다른 자인지를 탐구한다면, 진리를 깨달을 것이다. 그러면 그 진리가 모든 업을 불태움으로써 당신은 환생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것이다. 여러 경전들이 생생하게 전하는 진리는 이러하다. 산더미처럼 쌓인 화약도 작은 불꽃 하나로 순식간에 날아가버리듯이, 셀 수 없이 많은 생을 살면서 쌓이고 쌓인 업도 지혜의 작은 불꽃으로 다 태워버릴 수 있다.
    이 복잡다단한 현상계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방대한 분야에 걸친 학문들은 모두 에고에서 비롯한 것이다. 자기탐구를 통해 에고를 없애면,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실체, 즉 <나>만이 남는다.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신만이 진정으로 존재하며, 존재하는 듯이 보이는 개인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깨달은 사람들은 이처럼 자기 자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아는 것만이 찬란히 빛나는 지고한 앎이라고 말한다.
    당신은 지금 자신이 개체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또한 당신 바깥에는 우주가 존재하며, 우주를 초월한 곳에 신이 이싿고 생각한다. 당신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는 분별심이 있다. 그러나 이런 관념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신은 당신이나 우주와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Q: 신에 대해서는 어떤 개념도 가져서는 안 되는가?
    A: 가슴 속에 다른 생각이 존재하는 한, 당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신에 대한 생각도 존재할 수밖에 없다. 결국 모든 생각을 부수고 신에 대한 생각마저 부수는 것, 그 생각 없는 생각만이 신에 대한 참된 생각이다.

    인간의 마음은 스스로 온갖 어려움을 만들어낸 다음, 구해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신이 어떤 사람에게는 평화를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슬픔을 줄 정도로 편파적이겠는가? 피조물 안에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건만, 인간은 좋은 것이나 건강한 것, 아름다운 것을 보지 않고 외면한다. 이는 마치 굶주린 사람이 맛있는 진수성찬을 앞에 놓고서도 손을 뻗어 음식을 먹으려고 하지는 않고 "이게 누구의 잘못인가? 신의 잘못인가, 인간의 잘못인가?"라며 불평불만에 매달리는 것과도 같다.

    우리 자신의 실체는, 무지의 어두운 망상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참된 지혜의 태양이다. 우리의 실체는 언제나 행복의 빛을 발산하고 있으므로, 모든 불행은 '개체성'이라는 그릇된 관념이 일으키는 허상일 뿐이다. 불행을 겪고 있다는 모든 사람은 실제로는 실체가 아닌 착각에 빠져 있을 뿐이다.
    우리가 그 자체로 지복인 <나>를 면밀히 탐구한다면, 우리 삶에서 불행이란 전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결코 '나'가 아닌 육체를 '나'라고 여김으로써 고통받는다. 그리고 이 망상에서 모든 고통이 비롯한다.

    꿈 속에서 배가 고프면 꿈 속의 음식을 먹어야 하며, 다른 사람이 굶주리는 것을 보면, 역시 꿈 속에서의 음식을 주어야 한다. 꿈꾸는 상태와 깨어 있는 상태는 결코 섞을 수 없다.
    당신이 깨달음에 도달해 이런 망상에서 깨어나기 전까지는,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에도, 에고 즉 '내가 행위자다'라는 생각을 비우고 '나는 신의 도구일 뿐'이라고 느끼면서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남을 돕는다는 마음에 우쭐해져서,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돕고 있다. 저 사람은 나의 도움이 필요하며, 나는 도와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나는 우월하고 저 사람은 열등하다'라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의 내면에 자리한 신을 섬긴다는 태도로 그를 도와야 한다. 모든 봉사는 참나인 나 자신을 위한 것이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을 돕는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도울 뿐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이나 다른 생명 있는 것들의 괴로움을 덜어주려고 애쓸 때, 그 노력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영적으로 진보할 수 있다. 특히 그런 행위가 사심 없이, 즉 '내가 이 행위를 하고 있다'는 에고의 느낌 없이 '신이 나를 매개체로 써서 봉사하고 있다. 신이 행위자이며 나는 도구이다'라는 마음으로 한다면 더욱 그렇다.
    만약 '남에게 주는 것이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주는 것'이라는 진리를 모든 사람이 안다면, 누군들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않겠는가? 모든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나>이기 때문에,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하든 사실은 모두 '나'에게 하는 것이다.

    Q: 인간의 자유는 어떻게 되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되는가?
    A: 인간이 지닌 유일한 자유는 깨달음을 그리워하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나아가 그 깨달음으로 더 이상 육체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게 될 것이다. 육체는 발현업에 따라 결정된 행위를 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여 육체가 한 행위들의 결과물에 집착하든지, 아니면 집착을 버리고 그저 '행위를 바라보는 자(witness)'로 남을 것인지 선택할 자유가 있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