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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과 나눈 이야기 book 2
    나의 서재 2024. 3. 30. 21:20

     

    book 2

    영혼은 ‘참된 자신’Who You Really Are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치유하고, ‘참된 자신’에 걸맞는 체험을 너희에게 가져다주기 위해, 지금 필요한 완벽한 상황과 환경을 본능적으로 추구한다.
    영혼의 바램은 너희가 신에게 되돌아가게 하는 것, 너희에게 나(神)를 절실히 느끼게 하는 것이다.
    영혼이 의도하는 바는 자신을 체험으로 알고, 따라서 나를 아는 것이다. 영혼은 너희와 내가 ‘하나’임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정신이 이 진리를 부정하고, 몸이 이 부정을 행동으로 옮긴다 할지라도.
    그러므로 위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라면 정신에서 벗어나, 대신 자기 찾기를 하라.
    영혼은 정신이 생각해낼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다.
    너희가 무엇이 자신에게 “최선”인지 알아내려고 애쓰면서 시간을 소비할 때, 그 선택은 조심스러울 것이고, 그 결정에는 영원한 시간이 걸릴 것이며, 그 여행은 기대의 바다 위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조심하지 않으면 너희는 자신의 기대 속에 빠지고 말 것이다.

    휘유! 굉장한 대답이군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제 영혼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제가 듣고 있음을 알 수 있을까요?

    영혼은 느낌feelings으로 말한다. 네 느낌에 귀를 기울이고, 네 느낌대로 따르며, 네 느낌을 존중하라.

    자신의 영혼에 귀 기울일 때, 너희는 무엇이 자신에게 “최선”인지 알 것이다. 자신에게 맞는 진실은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진실인 것만을 따라 행동할 때, 너희는 너희의 길을 따라 바른 속도로 달리는 중이고, “과거의 진실”에 근거한 체험에 따라 반응하지 않고 “지금의 진실”에 근거한 체험을 창조할 때, 너희는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내는 중이다.
    네가 선택한 현실을 창조하는 데 왜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느냐고? 그것은 네가 자신의 진실에 따라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리를 깨달아라, 그러면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니.
    그런데 일단 네 진실을 깨닫고 나면, 그걸 두고 마음을 자주 바꾸지 않도록 하라. 이렇게 되는 건 네 정신이 무엇이 “최선”인지 알아내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걸 그만둬라! 정신에서 벗어나라. 네 감각으로 되돌아가라!Get back to your senses!
    “분별력을 되찾아라”Get back to your senses고 할 때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느끼는가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네 생각은 말 그대로 생각일 뿐이고, 정신의 구조물, 네 정신이 “만들어낸” 창조물일 뿐이다. 하지만 네 감각이라면-그것은 지금 이 순간 실재하는 것이다.
    감각은 영혼의 언어이고, 네 영혼은 네 진실이다.

    각각의 순간을 그에 대한 사전 생각 없이 깨끗한 상태로 만날 때, 너희는 예전의 자신을 재연(再演)하는 대신 지금의 자신을 창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삶은 창조 과정이다. 그런데 너희는 줄곧 그게 마치 재연 과정인 것처럼 살고 있다.

    하지만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어느 누가 어떤 일이 일어나는 순간에 자신의 이전 체험을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그 문제에 관해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불러내고, 그에 따라 대응하는 게 정상 아닙니까?

    정상normal일 수는 있겠지, 하지만 자연스러운natural 것은 아니다. “정상”이란 건 일상적인 것을 뜻한다. “자연스러운” 건 애써 “정상”이려고 하지 않을 때의 너희 상태이다.
    자연스러움과 정상은 같은 게 아니다. 특정 순간에 너희는 정상인 일을 할 수도 있고, 자연스런 일을 할 수도 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어떤 것도 사랑보다 더 자연스럽지는 않다.
    사랑에 차서 행동한다면 너희는 자연스럽게 행동할 것이다. 하지만 두려워하고 화내고 분개하면서 반응한다면, 너희는 정상으로 행동할 수는 있지만, 결코 자연스럽게 행동하지는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너희는 뭔가를 배우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게 아니다.(1권을 다시 읽어라!) 삶은 학교가 아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너희의 목적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시 구성하는re-member(기억하는-옮긴이) 것이다. 

    삶이란 걸 하나의 시험, 시련, 너희가 “가치” 있는지 알아보고, 너희 역량을 시험하는 시기로 믿는다면, 그때부터 너희 신학은 의미 있는 것이 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삶이란 걸 하나의 기회, 너희가 가치 있음을(그리고 항상 그래왔음을) 발견하는, 즉 기억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믿는다면, 그때부터 너희 신학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것이다.
    너희가 주목과 숭배와 감사와 애정을 요구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죽이기도 하는, 자기애로 가득찬 신을 믿는다면, 그때부터 너희 신학들은 함께 합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너희가 자기애나 욕구가 없는 신, 단지 모든 것의 원천이고 모든 지혜와 사랑의 토대인 신을 믿는다면, 그때부터 너희 신학은 산산히 흩어진다.
    너희가 자신의 사랑으로 질투하고, 자신의 분노로 격노하는 복수심 많은 신을 신이라고 믿는다면, 그때부터 너희 신학은 완벽해진다.
    하지만 너희가 그녀 자신의 사랑 속에서 기뻐하고, 그녀 자신의 법열(法悅)로 열광하는, 온화한 신을 신이라고 믿는다면, 그때부터 너희 신학은 쓸모없어진다.
    너희에게 말하노니, 삶의 목적은 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목적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자신’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너희는 신을 기쁘게 하며, 또한 그녀를 영광스럽게 한다.

    사건과 체험들은 너 개인이나 너희 집단이 의식을 매개로 하여 너희에게로 끌어온 기회들이다. 체험을 창조하는 것이 의식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가 지금 보여주는 것보다 더 높은 의식을 가진 존재이니, 너희는 의식을 끌어올리면서, ‘자신’을 창조하고 체험하는 도구로 쓰려고 이런 기회들을 자신에게로 끌어온다.
    너희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 내 의지이기에, 나는 너희가 그것을 위해 창조하려는 사건이나 체험이면 무엇이든 너희에게로 끌어가게 해준다.
    이 ‘우주 게임’에는 다른 배우들도 수시로 너희에게 가담한다. 그 배역이 ‘짧은 만남’이든, ‘주변인물’이든, ‘한때의 팀원’이든, ‘오랜 동안의 상호작용자’이든, ‘친척과 가족’이든, ‘몹시 사랑하는 사람’이든, ‘인생길의 동반자’이든.
    영혼들을 너희에게 끌어오는 건 너희 자신이고, 너희를 그들에게 끌어가는 건 그들 자신이다. 그것은 양쪽의 선택과 바램들을 함께 표현하면서 공동으로 창조하는 체험이다.
    누군가가 우연히 너희에게 오는 일은 없으며,
    우연의 일치 따위는 절대 없다.
    어떤 일도 마구잡이로 일어나지 않으니,
    삶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너희는 너희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을 끌어오듯이, 사건들도 끌어온다. 행성 차원에서의 대규모 체험과 발전들은 집단의식의 결과이다. 그것들은 전체로서 집단group이 선택하고 바란 결과가 전체로서 너희 집단에게 끌어온 것들이다.

    “너희 집단”이란 게 무슨 뜻입니까?

    집단의식Group consciousness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엄청나게 강력하여, 자칫하면 자주 개인의식을 압도하고 만다. 따라서 이 행성에서 겪는 너희의 사회적 인생 체험이 조화롭기를 바란다면, 너희는 어디를 가든, 어떤 일을 하든, 언제나 집단의식을 창조하려고 애써야 한다.
    만일 네가 그 집단의식으로 너 자신의 의식을 반영하지 못하는 집단에 속해 있는데, 당분간은 그 집단의식을 효과적으로 바꿀 수 없다면, 그때는 그 집단을 떠나는 것이 현명하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 집단이 너를 이끌어갈 것이다. 그 집단은 네가 원하는 곳에 개의치 않고,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갈 것이다. 
    만일 네 의식과 합치하는 의식을 가진 집단을 찾을 수 없다면, 그때는 스스로 한 집단의 발단이 되도록 하라. 비슷한 의식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네게로 끌려올 것이다.
    너희 행성에 지속적이고 의미 있는 변화들이 일어나게 하려면, 개인과 소집단들이 대집단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마침내는 가장 큰 집단인 인류 전체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해야 한다.
    너희 세상과 그것이 처한 상황은 거기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결합된 전체의식을 반영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바라는 것들을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그것들에 대한 너희의 사랑이 그것들을 너희에게로 끌어오리니.
    이것들은 모두 삶의 재료들이다. 그것들을 사랑할 때, 너희는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바란다고 선언할 때, 너희는 삶이 마땅히 제공해야 할 모든 좋은 것들을 택하겠노라고 공표하는 것이다.
    그러니 섹스를, 너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섹스를 선택하라! 그리고 권력을, 너희가 모아들일 수 있는 모든 권력을 선택하라! 그리고 명성을, 너희가 잡을 수 있는 모든 명성을 선택하라! 또 성공을, 너희가 이룰 수 있는 모든 성공을 선택하라! 그리고 승리를, 너희가 체험할 수 있는 모든 승리를 선택하라!
    하지만 사랑 대신에 섹스를 택하지 말고, 사랑에 대한 축하로 섹스를 선택하라.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권력을 택하지 말고,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권력을 택하라. 그 자체가 목적인 명성을 택하지 말고, 더 큰 목적을 이룰 수단으로 명성을 택하라. 남들의 희생을 댓가로 한 성공을 택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돕는 도구로 성공을 택하라. 그리고 온갖 희생을 다 치른 승리를 택하지 말고, 남들을 전혀 희생시키지 않는 승리, 나아가 그들에게도 이득이 되는 승리를 택하라.
    나아가 남들의 아첨을 선택하라. 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을 너희가 아첨으로 흠뻑 적실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존재로 여겨라!
    나아가 더 나아지길 선택하라. 하지만 남들보다 더 나아지지 말고, 이전의 자신보다 더 나아지도록 하라.
    나아가 더 많이 갖길 선택하라. 하지만 오직 더 많이 주기 위해서만 그렇게 하라.
    그 다음엔, 그렇다, “방법을 알고 이유를 알길” 선택하라. 그리하여 모든 지식을 남들과 함께 할 수 있도록.
    그리고 온갖 수단을 다해 ‘신을 알길’ 선택하라. 아니, 사실 ‘이것을 가장 먼저 선택하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를 수 있도록.
    너희는 평생 동안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좋다는 가르침을 받아왔다. 하지만 가진 것이 없으면 줄 수도 없다.
    자기 만족이 그토록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고,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추하게 들리게 된 것이 그토록 불행한 일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는 자기 만족이 남을 희생한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그것은 남들의 욕구를 무시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삶이란 게 반드시 자신의 욕구를 무시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자신에게 넉넉한 즐거움을 주어라. 그러면 너희는 남들에게 줄 넉넉한 기쁨을 가지리니.

    생각과 관련해서 의미 있는 질문은 딱 한 가지뿐이다. 그런 생각을 지니는 게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가? ‘자신이 누구이고’ ‘자신이 추구하는 존재’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 생각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가?
    바로 이것이 사람들이 세상을 살펴볼 때, 물어야 할 질문이다. 이런 생각을 지니는 게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가?
    내가 관찰하기로는, 소위 불리함을 안고 태어난 사람들, 아니 집단들은 존재한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아주 높은 형이상학적 차원에서는 누구도 “불리하지 않은” 것 역시 사실이다. 개개 영혼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에 딱 맞는 사람과 사건과 환경을 자기 스스로 창조하기 마련이기에.

    너희는 ‘참된 자신’이 되려 하고, ‘참된 자신’을 체험하려 하며, 그것을 창조하려 하고 있다. 너희는 ‘지금’이라는 모든 순간마다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고 있다.
    이제 이런 문맥 속에서, 너희 세계에서 관찰되는 식의 상대적인 용어로, 소위 불리해보이는 사람과 마주쳤을 때, 너희가 물어야 할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저 상황과 관련해서 나는 누구이며, 나는 어떤 존재가 되려 하는가?
    달리 말해 어떤 상황에서든 언제나, 너희가 남과 만났을 때는 나는 여기서 무엇을 바라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내가 여기서 하려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내 말을 알아듣겠는가? 너희의 첫 번째 질문은 언제나, 나는 역시 무엇을 바라는가여야 한다. 다른 사람이 여기서 무엇을 바라는가가 아니라.

    너희 인간관계들이 그토록 엉망진창인 건, 너희가 언제나 상대방이 원하고 남들이 바라는 것을 알아내려 애쓰기 때문이다. 너희가 진실로 원하는 것 대신에 말이다. 그러고 나면 너희는 그것을 상대방에게 줄지 말지 결정하게 되는데 먼저 살펴보고 나서 결정한다. 너희가 보기에 상대방에게서 바랄 것이 전혀 없다면,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주어야 할 으뜸가는 이유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니, 너희는 거의 그렇게 하지 않는다. 반면에 너희가 바라거나 바랄지도 모르는 뭔가가 상대방에게 있는 걸 보게 되면, 너희의 자기생존 양태가 잽싸게 자리를 차고 들어앉아, 너희는 상대방이 바라는 것을 주려고 애쓰게 된다.
    그리고 나면 너희는 그렇게 한 것에 화를 낸다. 특히나 상대방이 너희가 바라는 것을 결국 주지 않을 때는.
    ‘나는 너와 거래하겠다’는 이 게임에서 너희는 대단히 섬세한 균형을 잡는다. 네가 내 필요를 채워주면 나도 네 필요를 채워주겠다는 식의 균형을
    하지만 개인 관계들만이 아니라 국가 관계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인간관계의 목적은 이런 것들과는 전혀 무관하다. 너희가 사람이나 장소나 사물과 ‘신성한 관계’를 맺는 목적은 그들이 바라거나 필요로 하는 것을 알아내는 데 있지 않고, 성장하고 너희가 바라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너희가 필요로 하거나 바라는 것을 알아내는 데 있다.

    너희가 어떤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은 그를 깨어나게 만드는 것, 그에게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 기억하게 만드는 것임을 기억하라.

    저는 지금 몹시 혼란스럽습니다. 그렇다면 도움을 주는 것이 오히려 권능을 빼앗게 되는 경우는 언제입니까? 그것이 다른 사람의 성장을 돕지 않고 오히려 방해하게 되는 때는요?

    너희의 도움이 신속한 자립이 아니라 계속적인 의존을 가져오는 방식으로 제공될 때.
    너희가 자비를 명분으로 하여,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의존하지 않고 너희에게 의존하기 시작하도록 놔둘 때.
    이것은 자비가 아니라 강제이다. 그런 종류의 도움은 진실로 강제라는 동력 엔진에 시동을 거는 것이기에. 그런데 여기서 이 차이는 대단히 미묘해서, 때때로 너희는 자신이 시동을 걸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너희는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그냥 다른 사람을 도울 뿐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단지 너희 자신의 자부심만 키우는 것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남들의 너희에게 의존하도록 놔두면 놔두는 만큼, 그것은 그들이 너희를 힘 있는 존재로 만들도록 놔두는 것이니, 그렇게 되면 너희는 당연히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도움은 약자(弱子)을 유혹하는 최음제이다.
    목표는 약한 사람이 더 약해지게 하는 데 있지 않고, 약한 사람이 강해지도록 돕는 데 있다.
    정부가 주도하는 많은 복지정책들이 지닌 문제가 이것이다. 그 정책들도 주로 뒤의 방식이 아니라 앞의 방식으로 일한다. 정부 정책이란 건 자기 지속성을 갖기 마련이니, 지원하려는 사람들을 돕는 만큼이나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것이 그 정책들의 목적일 수 있다.
    모든 정부 지원에 한계가 있다면, 국민들은 정말로 필요할 때 도움을 받더라도, 그 도움에 중독되어 그것을 자신의 자립과 맞바꾸지 않게 될 것이다.
    정부는 도움이 힘인 걸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정부가 비난받지 않을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제공하는 이유이다. 정부가 돕는 사람들의 수가 많을수록 정부를 돕는 사람들의 수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정부가 부양하는 사람들이 정부를 부양한다.

    조직된 종교가 성공하려면, 사람들이 그것을 필요하다고 믿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른 어떤 것을 믿으려면, 그들은 먼저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어야 한다. 그러니 조직된 종교의 첫째 가는 과제가 너희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두 번째 과제는 너희가 지니지 않은 대답을 종교가 지니고 있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이고,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과제는 너희가 그것의 대답을 아무 의문 없이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의문스러워 할 때, 너희는 생각하기 시작한다! 생각하기 시작하면 너희는 ‘내면의 원천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종교는 너희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 자칫하면 종교가 고안해낸 것과 다른 대답에 너희가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는 너희가 자신을 의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거침없이 생각할 수 있는 너희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도록.
    종교가 부딪치는 문제는 이것이 너무 자주 불리한 결과를 낳는다는 데 있다. 만일 너희가 의심 없이는 자신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너희는 종교가 주는, 신에 대한 새로운 발상 역시 의심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그리하여 얼마 안가 너희는 역설적이게도 이전에는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내 존재까지도 의심한다. 너희가 직관의 깨달음에 따라 살던 시절에는, 나를 전혀 그려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명확히 알고 있었거늘! 
    불가지론자들을 만들어낸 건 종교다.
    종교가 해온 일을 찬찬히 살펴본 명석한 사상가라면 누구라도 종교에는 신이 없다고 가정해야 하리라. 한때는 인간이 그 가장 눈부신 광채에 휩싸인 ‘존재’를 사랑하던 그 자리에, 인간의 가슴을 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채운 것이 종교이기에.
    신 앞에 머리 숙여 절하도록 명령한 것도 종교이다. 한때는 인간이 기쁨에 찬 뻗침으로 뛰어오르던 그 자리에.
    신이 분노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인간에게 짐지운 것도 종교이다. 한때는 인간이 자기 짐을 가볍게 하려고 신을 찾던 그 자리에.
    인간에게 자기 몸과 그 몸의 가장 자연스런 기능들을 부끄러워하라고 말했던 것도 종교이다. 한때는 인간이 그런 기능들을 삶의 가장 큰 선물로 찬양하던 그 자리에.
    너희가 신에게 이르려면 중개자를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 것도 종교이다. 한때는 너희가 삶을 선하고 진실되게 살기만 하면 직접 신에게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 자리에.
    그리고 인간들에게 신을 받들라고 명령한 것도 종교이다. 한때는 인간들이 그렇게 하지 않기란 불가능하기에 신을 받들었던 그 자리에!
    어디에서나 종교는 자신이 신의 대립물인 부조화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경험했다!
    종교는 인간을 신에게서, 인간을 인간에게서, 남자를 여자에게서 분리하여-실제로 몇몇 종교들은 신이 인간보다 뛰어나다고 주장하듯이 남자가 여자보다 뛰어나다고 말하고 있다-, 인류의 절반에게 지금껏 떠맡겼던 역할들 중에서 가장 큰 익살극을 위한 무대를 설치해왔다.
    내가 너희ㅡ에게 이르노니, 신은 인간보다 뛰어나지 않고, 남자는 여자보다 뛰어나지 않다. 그것은 “사물의 자연질서”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즉 남자들) 모두가 남성 숭배 종교를 만들어냈을 때 원했던 방식일 뿐이다. 그 “신성한 경전”의 최종판에서 자료의 반을 체계적으로 잘라내고, 그 나머지를 그들의 남성 중심 세계상이라는 주형에 맞게 뒤틀어 남성 숭배 종교를 만들어냈을 때.
    오늘날까지도, 어쨌든 여자는 더 열등하며, 어쨌든 하위 등급의 영적 시민이고, 어쨌든 신의 말을 가르치고 신의 말을 설교하는 목회자가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종교다.
    애들처럼 너희는 아직도 어느 성(性)을 내 사제로 삼을지 정한 것이 나라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모두가 다 사제들이다. 너희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다른 사람보다 내 일을 하기에 더 “적합하지” 못한 사람이나 계급은 없다.
    하지만 너희 남자들 중 다수는 너희 국가들과 아주 흡사하다. 권력에 굶주려 있는 그들은 권력을 함께 나누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냥 행사하기만 바란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과  똑같은 종류의 신을 고안해냈다. 권력에 굶주린 신, 권력을 함께 나누지는 않고, 그냥 그것을 행사하기만 바라는 신,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신의 가장 큰 선물은 신의 권능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나는 너희를 나처럼 만들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당신처럼 될 순 없어요! 그건 신에 대한 불경입니다.

    불경이란 건 너희가 그렇다고 배워온 것이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신의 형상대로 신과 닮은꼴로 만들어졌다. 너희가 이곳에 온 것은 이 운명을 완수하기 위해서이다.
    너희는 애쓰고 투쟁하고 결코 “그곳에 이르지” 못하기 위해서 이곳에 오지 않았다. 더구나 나는 너희가 완수할 수 없는 임무를 너희에게 지우지도 않았다.
    신의 선함을 믿고, 신이 만든 창조물인 신성한 너희 자신을 믿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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