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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과 나눈 이야기 book 1
    나의 서재 2024. 3. 30. 21:19

     

    이 책을 읽기까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영적 체험을 했던 어느 지인이 추천해준 책이기도 했고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분이 추천해서 제대로 읽어보겠다는 생각에 원서를 구매해서 읽으려고 했었다. 그러던 중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 이 책에 대한 비판글을 보고 이 책을 읽기에 망설여져서 결국엔 원서를 버렸다. 그러다 얼마전 지인과 얘기를 나누던 중 그간 있었던 일을 얘기하니 한번은 꼭 읽어보라 하셔서, '그래 내가 직접 읽어보지 않고서 판단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신나이 통합본을 읽게 되었다. 물론 전에 이 신나이 통합본을 제외한 저자의 다른 책들도 두세권 읽어보았으나, 책 팔려고 내놓은 상술로밖에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수준은 미달이었다. 직접 읽어보니 그간 내가 가지고 있었던 편견과 관점이 얼마나 편협했는지를 깨닫게 되었고, 읽을 수 있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 생각되었다. 자신의 생각과 관점을 고수하는 사람은 읽어도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마련이다. 한 때 나도 그랬고 아직 완전히 그 때가 벗겨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밤에 하늘의 별을 보아도 얼마나 광활한 우주의 섭리가 존재하고 있는지 어렴풋하게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면 좋은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일부 내용을 발췌하였다.

    book 1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는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 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쪽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밖의 모든 개념들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른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런 사정 때문이며, 사람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그리하여 너희가 지고한 사랑을 맹세하는 바로 그 순간 너희는 가장 큰 두려움을 맞아들이게 된다.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이하 ‘자신’으로도 번역-옮긴이) 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그토록 경이로운 장대함을 그 누가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런 존재에게서는 신조차도 흠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자신이 누군지 알지 못하며, 엄청나게 못난 존재로 생각한다. 그러면 너희는 자신이 그토록 못난 존재라는 생각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온갖 것들에 대해서 너희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전해준 유일한 사람들, 즉 너희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이다.
    이들은 너희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어째서 그들이 거짓말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들은 너희에게 이건 지나치고 저건 부족하다는 식으로 말해오지 않았던가? 너희는 그들이 너희를 바라보긴 하지만 받아들여주지는 않는다는 걸 몇 번이나 느끼지 않았던가? 그들은 너희가 가장 충만감을 느끼는 바로 그 순간에 종종 너희를 나무라곤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들은 너희가 더없이 분방한 상상 중 얼만가를 무시해버리도록 유도하지 않았던가?
    너희가 받아온 메시지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이것들은 기준에 맞지도 않고, 따라서 신(God)에게서 나온 메시지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그 메시지들은 너희 세계의 신들(gods)에게서 나왔음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너희에게 사랑이 조건부라고 가르친 사람들은 너희 부모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내세우는 조건들을 숱하게 경험했다. 또 너희의 사랑하는 관계에서조차 이런 체험을 고려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도 너희 부모들이다.
    그것은 또 너희가 내게 적용하는 체험이기도 하다.
    이런 체험에서 너희는 나에 관한 결론을 이끌어내며, 이런 틀 속에서 너희는 너희의 진실을 이야기한다. “신은 사랑의 신이지. 하지만 우리가 그 분의 계명을 어긴다면 그 분은 우리를 영원히 추방하고 영원히 단죄하실 거야.”
    너희는 너희 부모가 내린 추방을 체험했고, 그들이 내린 단죄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것과 다르리라고 너희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너희는 조건없이 사랑받는 게 어떤 건지 잊어버렸다. 너희는 신의 사랑을 체험했던 걸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너희는 세상에서 보는 사랑의 모습에 따라 신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상상해보려 애쓴다.
    너희는 부모의 역할을 신에게 투사(投射)해왔기 때문에, 너희가 한 짓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심판한 다음, 상을 주거나 벌을 주는 신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것은 너희의 신화에 근거한, 지나치게 단순화된 신관(神觀)이다. 이것은 내 본질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너희는 이렇게 영적 진리들이 아니라 인간의 체험에 근거한, 신에 관한 사유체계 전체를 만들어낸 뒤, 사랑을 둘러싼 실체 전체도 창조해냈다. 그것은 복수심에 불타는 무서운 신이라는 개념에 뿌리를 둔 실체이며, 두려움에 그 근거를 둔 실체이다. 그것의 받침 생각은 틀린 것이지만, 그런 생각을 부정한다면 너희의 신학 전체가 무너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신학을 대신할 새로운 신학이 참으로 너희를 구원해준다 할지라도, 너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두렵지 않은 신, 심판하지 않는 신, 벌줄 이유가 없는 신이라는 개념은 그냥 너무나 근사해서, 신의 본질에 관한 너희의 어떤 거창한 관념으로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두려움에 근거한 사랑의 실체가 너희의 사랑 체험을 지배하고 있으며, 사실 그런 체험을 실제로 창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너희는 자신이 받는 사랑이 조건부라는 것도 알고 있으며, 나아가 자신이 같은 식으로 사랑을 주는 걸 경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가 자신의 조건들을 굳게 지키거나 물리거나 설정하는 동안에도, 너희의 한 부분은 이런 게 진짜 사랑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너희는 사랑을 펼치는 그런 방식을 바꾸기에는 무력하다고 느낀다. 너희는 자신에게 말한다. ‘이제까지 나는 확고한 사랑법을 배워왔다. 이제 또 다시 불안정한 상태로 되돌아간다면 나는 영원히 저주받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다. 불안정한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면 너희는 영원히 저주받을 것이다.
    [사랑에 관한 너희의 (잘못된) 생각 때문에, 너희는 자신에게 끝내 순수한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리란 저주를 내리고 있으며, 또 그 때문에 참된 나(神)를 끝내 알지 못하리란 저주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너희가 나를 영원히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기에, 우리가 화해하는 순간은 반드시 올 것이기에, 너희는 결국 순수한 사랑을 체험하고 내 참모습을 알게 될 것이다.]
    단순히 인간관계와 관련된 것들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행동이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쪽에 뿌리박고 있다. 상업과 산업, 정치, 종교, 2세 교육, 너희 국가들의 사회문제, 너희 사회의 경제 목표에 영향을 주는 결정들, 전쟁과 평화와 공격과 방어와 침략과 항복에 관련된 선택들, 즉 탐낼 것인지 양보할 것인지, 쌓아둘 것인지 분배할 것인지, 합칠 것인지 나눌 것인지에 대한 결정들-너희가 지금까지 내린 이 모든 자유로운 선택 중에서 존재할 수 있는 단 두가지 생각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즉 사랑이라는 생각이나 두려움이라는 생각에서.
    두려움은 움츠러들고 닫아걸고 조이고 달아나고 숨고 독점하고 해치는 에너지다.
    사랑은 펼치고 활짝 열고 풀어주고 머무르고 드러내고 나누고 치유하는 에너지다.
    두려움은 우리 몸을 옷으로 감싸나, 사랑은 우리가 발가벗고 설 수 있게 해준다. 두려움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틀어쥐고 집착하게 하나, 사랑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눠주게 한다. 두려움은 갑갑함을 지니나, 사랑은 정을 지닌다. 두려움은 움켜잡지만, 사랑은 보내준다. 두려움은 사무치게 하지만, 사랑은 달래준다. 두려움은 공격하지만, 사랑은 치유한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이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에 근거하고 있다. 그 외에 다른 감정이란 없기에 너희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 그러나 이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너희의 자유다.

    그러면 신의 바램은 무엇이겠는가?
    우선 나는, 내 모든 영광 속에서 나 자신을 알고 체험하기를, 다시 말해 ‘내가 누구인지’ 알기를 바란다. 내가 너희와 우주의 온갖 세계들을 발명하기 전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두 번째로 나는, 그것이 어떤 방식이 되든, 너희가 선택하는 방식으로 너희 자신을 창조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내가 너희에게 준 힘을 가지고, 너희가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알고 체험하기를 바란다.
    세 번째로 나는, 삶의 전과정이 지금이라는 순간순간마다 끊임없는 기쁨과 계속되는 창조와 결코 끝나지 않을 확장과 완전한 성취를 체험하는 것이 되길 바란다.
    나는 이런 바램들이 실현될 수 있는 완벽한 체계를 세워 놓았다. 그 바램들은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실현되고 있는 중이다. 너희와 나의 유일한 차이는 나는 이 사실을 안다는 데 있다.

    생각은 창조의 첫 단계다.
    그 다음에 말이 온다. 너희의 모든 말은 밖으로 표현된 생각이다. 말에는 창조력이 있고, 말은 창조 에너지를 우주 속으로 내보낸다. 말은 생각보다 더 역동적이다(따라서 좀 더 창조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말은 생각과 진동 수준이 다르다. 말은 생각보다 더 강한 충격으로 우주를 뒤흔든다(바꾸고 변화시키고 영향을 미친다).
    말은 창조의 두 번째 단계다.
    그 다음에 행동이 온다.
    행동은 움직이는 말이다. 말은 표현된 생각이다. 생각은 형성된 발상이고, 발상은 한데 모인 에너지들이다. 에너지는 풀려난 힘이고, 힘은 존재하는 요소들이다. 요소들은 신(神)의 조각들이고, 전체의 일부들이며, 모든 것의 재료이다.
    그 시작은 신이다. 그 끝은 행동이다. 행동은 창조하는 신, 즉 체험된 신이다.
    너희는 자신이 신의 일부가 되고 신과 동업관계를 맺기에 충분할 만큼, 훌륭하지도 않고 경이롭지도 않고 죄없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너희는 너무 오랫동안 ‘자신’을 부정해온 탓에 ‘자신이 누구인지’ 잊고 말았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로 일어난 일이 아니며, 어쩌다 그렇게 된 것도 아니다. 그 모두가 신성한 계획의 일환이다. 너희가 이미 너희 자신이라면 너희는 ‘자신’을 불러낼 수도 창조할 수도 체험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너희가 ‘자신’을 충분히 창조함으로써, 즉 불러냄으로써 ‘자신’을 충분히 체험하자면, 우선 나와의 연결을 끊는(부정하거나 잊는) 게 필요했다. 너희의 가장 원대한 소망이자 내 가장 위대한 바램은, 너희 자신을 너희이기도 한 나Me you are의 일부로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모든 단일한 순간마다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면서 자신을 체험하는 과정 속에 있다. 내가 너희를 통해 그러하듯이.
    이 동업관계를 이해하겠는가? 그 의미를 파악하겠는가? 그것은 신성한 협력, 참으로 성스러운 교섭이다.
    네가 인생이 “도약하는”걸 선택할 때, 네 인생은 너를 위해 그렇게 할 것이다. 너는 지금까지 그렇게 하길 선택하지 않았다. 너는 꾸물거리고 미루고 연기하고 항의해왔다. 이제 내가 네게 약속한 걸 공표하고 만들어낼 때가 왔다. 이렇게 하려면 너는 약속을 믿어야 하고, 또 그것에 따라 살아야 한다. 너는 신의 약속을 실천해야 한다.
    신의 약속은 네가 그의 아들이요, 그녀의 자식이며, 신과 닮은꼴이고, 신과 동등한 존재라는 것이다.

    너는 세상이 네게 가져다준 것들에 더 이상 만족하지 않는다. 너는 세상이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해준 것들을 놓고 기뻐하지 않는다. 너는 고통과 괴로움을 멎게 하고 환상을 끝장내고자 한다. 너는 지금대로의 세상에 질려 있다. 너는 더 새로운 세상을 추구한다.
    하지만 더 이상 새로운 세상을 구하지 마라. 이제 그것을 불러내도록 하라.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더 알기 쉽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그러지. 우선 자신에 관한, 네 가장 고귀한 생각(자신이 신과 동등한 존재라는 생각-옮긴이)을 갖도록 하라. 네가 날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산다면 되리라고 생각되는 네 모습을 상상해보라. 네가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할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행동하고 말하는 것에 네가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해보라.
    그 모습과 네가 현재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걸 알겠느냐?

    예.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걸 알겠습니다.

    좋다. 지금 이 순간의 너는 자신에 관한 고귀한 전망을 살고 있지 않다는 걸 너도 나도 알고 있기에, 당연히 그럴 것이다. 이제 네가 지금 있는 곳과 되고자 하는 곳 사이의 차이를 알았으니, 네 생각과 말과 행동을 네 가장 고귀한 전망에 걸맞게 바꾸기 시작하라, 의식적으로 바꾸기 시작하라.
    그렇게 하려면 실로 엄청난 정신과 육체의 노력이 필요하다. 네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순간순간 끊임없이 관찰하는 일도 해야 한다. 또 여기에는 선택을 계속해서 의식적으로 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 모든 과정이 자각으로 가는 위대한 발걸음이다. 만일 네가 이 도전을 받아들인다면, 너는 평생의 반을 아무 의식없이 보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즉 너는 지금까지의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만들어낸 결과들을 체험할 때까지는, 네가 무엇을 선택하는지 의식 차원에서 자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며, 또 이 결과들을 체험하고 나면, 그 결과들이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과 관련 있음을 부정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내가 지금 하는 얘기는 그런 의식 없는 삶을 그만두라는 외침이다. 이것은 너희의 영혼이 태초부터 너희에게 일깨우고자 했던 과제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계속 관찰해나간다는 건 끔찍할 정도로 피곤한 일이 될 것 같은데.......

    그럴 수 있다. 그것이 제이의 천성(天性)이 되기 전까지는. 사실 그것은 너희의 두 번째 천성이다. 너희의 첫 번째 천성은 조건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너희의 첫 번째 천성, 즉 너희의 참된 천성을 의식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게 두 번째 천성이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걸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의식하는 게 사람을 “멍청하게 만들지” 않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다. 전과 달라지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우둔해지지는 않는다. 예수가 멍청했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부처가 함께 있기에 따분한 존재였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었고 함께 있어 달라고 간청했다. 깨달음을 얻는 그 누구도 멍청하지 않다. 아마 남다르고 비범하긴 하겠지. 하지만 결코 멍청하지는 않다.
    그래, 네 삶이 “도약하길” 바란다고? 그렇다면 지금 당장 네가 되기 바라는 대로 네 사람을 그려보고 그 속으로 옮겨가도록 하라. 그것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 모든 생각, 모든 말, 모든 행동을 점검하라. 그런 것들에서 떨어져라.
    네 고귀한 전망에 걸맞지 않는 생각을 하게 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생각으로 바꾸도록 하라. 네 가장 위대한 이상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게 되면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게끔 적어두어라. 네 가장 좋은 의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게 되면,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라.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연관된 사람들과 함께 그런 행동을 바로잡도록 하라.

    우주에 관해 이해해야 할 첫 번째 사실은 어떤 상황도 “좋거나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그건 그냥 있을 뿐이다. 그러니 가치판단 내리길 그만둬라.
    두 번째로 알아둬야 할 사실은 모든 상황이 다 한 순간이라는 것이다. 항상 똑같이 머무는 건 없으며, 정지된 채 남아 있는 건 하나도 없다. 그러니 뭔가를 어떤 식으로 변화시키느냐는 너희에게 달려 있다.

    영혼은 자신이 목표가 진화라는 걸 확실히 알고 있다. 진화야말로 영혼의 유일한sole 목표이자 그것의 영적soul 목표다. 그것은 몸의 성취나 마음의 성숙에는 관심이 없다. 영혼에게는 이런 것들이 전혀 무의미하다. 
    또 영혼은 몸을 떠나는 일이 별다른 비극이 아니란 것도 분명하게 알고 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비극은 몸 속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너희는 영혼이 이 죽음 전체를 다르게 본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물론 영혼은 “삶” 전체도 다르게 본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살면서 심한 좌절과 불안을 느낀다. 너희의 좌절과 불안은 영혼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영혼이 추구하는 것은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고귀한 사랑의 느낌이다. 바로 이것이 영혼의 바램이다. 바로 이것이 영혼의 목표다. 영혼은 그 느낌을 추구한다. 지식이 아니라 느낌을. 지식은 이미 갖고 있지만, 지식은 개념에 불과하다. 느낌은 체험이다. 영혼은 자신을 느끼고자 하며, 직접 체험하여 자신을 알고자 한다.
    가장 고귀한 느낌이란 ‘존재 전체’와 하나가 되는 체험이다. 이러한 체험은 영혼이 갈망하는, 진리로의 위대한 복귀(復歸)이다. 이것이 완벽한 사랑의 느낌이다.
    완벽한 사랑이란 완벽한 흰빛이 일반 빛깔에 대해 어떤 관계인지 느끼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흰빛을 아무 빛깔도 없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흰빛은 모든 다른 빛깔을 다 포함한다. 흰빛은 존재하는 모든 다른 빛깔이 섞인 것이다.
    사랑 역시 감정(증오, 분노, 정욕, 질투, 탐욕)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감정의 합(合)이다. 그것은 그 모든 감정의 총화이며, 모든 것everything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완벽한 사랑을 체험하려면 인간의 모든 감정을 다 맛봐야 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무슨 수로 연민을 느낄 수 있겠는가? 내가 한번도 체험하지 못한 감정을 다른 사람이 품고 있을 때 무슨 수로 그것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이 밟아나가는 여행의 단순함과 그 외경스런 위대함을 함께 보는 것이다. 우리는 마침내 그것이 무엇에 이르고자 하는지 이해한다.
    인간 영혼의 목표는 그 모든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도록.
    인간의 영혼이 한번도 아래에 있어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위에 있을 수 있겠는가? 한번도 오른쪽에 있어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왼쪽에 있을 수 있겠는가? 차가움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따뜻해질 수 있으며, 악을 거부하고서 어떻게 선해질 수 있겠는가? 만일 선택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 영혼은 뭔가가 될 수도 없다. 영혼이 자신의 숭고함을 체험하려면, 숭고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숭고함 외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영혼은 숭고함을 체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영혼은 숭고하지 않은 공간에서만 숭고함이 존재한다는 걸 깨닫는다. 따라서 영혼은 숭고하지 않음을 절대로 비난하지 않는다. 영혼은 그것을 축복한다. 자신의 다른 부분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자신의 일부를 그 속에서 보기 때문에.
    물론 영혼이 하는 일은 우리가 숭고함을 선택하도록 만드는 것, 최상의 ‘자신’을 고르도록 만드는 것이다. 너희가 고르지 않는다 해도 비난하는 일 없이.
    이것은 많은 생을 들여야 할 만큼 엄청난 과제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을 축복하기보다는, 판단내리기에 급급하고, 뭔가를 “잘못됐다”거나 “나쁘다”거나 “충분치 않다”고 규정하는 데 급급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비난하는 것보다 더 고약한 일을 하고 있다. 사실 너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에 해를 입히려 한다. 너희는 그것을 파괴하려 한다. 너희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나 장소나 사물이 있으면, 너희는 그것을 공격한다. 자신의 종교에 맞서는 종교가 있으면, 너희는 그것을 틀린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자신의 생각과 상반되는 생각이 있으면, 너희는 그것을 비웃는다. 자신의 이념과 다른 이념이 존재하면, 너희는 그것을 배척한다. 너희는 잘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 건 반쪼가리 우주를 창조하는 것이기에. 그래서 다른 반을 거부하며 내칠 때 너희는 자신의 반조차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너도 알다시피, 결국에 가서는 모든 게 잘되리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게 무슨 뜻인가요?

    너희가 이 게임에서 지는 일은 없다는 뜻이다. 너희는 길을 잘못 들 수 없다. 그런 건 계획의 일환이 아니다. 너희가 가고 있는 곳에 이르지 않을 방도는 없다. 너희의 목적지를 놓칠 방도는 없다. 신이 너희의 표적이라면, 너희는 운이 좋다. 왜냐하면 신은 너무 커서 절대로 놓칠 리 없을 것이기에.

    삶은 발견이 아니라 창조다.
    너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건 인생이 너희를 위해 지니고 있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다. 너희는 순간순간 너희 현실을 창조하고 있다. 아마 그것을 의식하진 못하겠지만.
    어째서 그런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가 여기 있다.
    1.나는 너희를 신의 형상대로, 신과 닮은꼴로 창조했다.
    2.신은 창조자다.
    3.너희는 하나 속에 셋인 존재들이다. 너희는 이 세 측면을 너희가 원하는 대로, 성부 성자 성신이라 할 수도 있고, 마음 몸 영혼이라 할 수도 있으며, 초의식 의식 잠재의식이라 부를 수도 있다.
    4.창조는 너희 몸의 이 세 부분들에서 진행되는 과정이다. 달리 말해 너희는 세가지 차원에서 창조한다. 생각과 말과 행동은 이 창조의 도구들이다.
    5.모든 창조는 생각에서 시작된다(“아버지에게서 시작된다”). 그러고 나면 모든 창조는 말로 옮겨간다(“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요, 말하라 그러면 이루어질 것이다[마태오 7:7-옮긴이]”). 모든 창조는 행동에서 완료된다(“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주했다[요한 1:14-옮긴이]”)
    6.너희가 생각은 하지만 한번도 말하지 않는 것은 한 차원에서만 창조한다. 너희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에서 창조한다. 너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너희 현실에 구현된다.
    7.너희가 진정으로 믿지 않는 어떤 것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창조 과정에는 반드시 믿음, 즉 깨달음이 들어가야 한다. 절대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소망 너머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성에 대한 깨달음이다(“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마태오 9:22-옮긴이]”). 따라서 창조에는 언제나 깨달음이 수반된다. 깨달음이란 본능적인 명확성, 완벽한 확실성, 어떤 것의 현실성에 대한 완벽한 인정이다.
    8.깨달음의 이 자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감사의 자리이다. 그것은 미리 하는 감사이다. 그리고 아마도 창조하기 전에 창조한 것에 대해 감사하는 이것이야말로 창조의 최대 열쇠일 것이다. 그같은 당연시 여김은 신이 용서하는 것일 뿐 아니라 격려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깨달음의 확실한 표식이다. 모든 선각자들은 그 행동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안다.
    9.너희가 창조하고 또 창조했던 모든 것을 찬양하고 즐겨라. 그것의 일부를 거부하는 건 자신의 일부를 거부하는 것이다. 너희 창조물의 일부로서 지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너희가 그것의 주인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옹호하고, 그것을 축복하고, 그것에 감사하라. 그것을 비난하지(“빌어먹을! God damn it!") 마라. 그것을 비난하는 것은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니.
    10.설사 창조의 일부 측면이 네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그것을 축복하면서 그냥 다른 것으로 바꾸도록 하라. 다시 선택하라. 새로운 현실을 불러오라.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새로운 말을 하고, 새로운 행동을 하라. 이것을 장대하게 해내라. 그러면 온 세상이 너를 따를 것이다. 너를 따를 것을 온 세상에 요구하고 크게 외쳐라. “나는 길이요 생명이니, 나를 따르라(요한 14:6-옮긴이)”고 말하라.
    이것은 바로 신의 의지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길이다.

    그게 그처럼 간단한 일이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게 이 열단계의 과정뿐이라면, 어째서 우리 중의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해내지 못하는 겁니까?

    너희 모두가 그런 식으로 해내고 있다. 너희 중 일부는 의식적으로 확실히 자각하면서 이 “시스템”을 쓰고 있고, 다른 일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뭘하는지도 모르면서 이 “시스템”을 쓰고 있다.
    너희 중 일부는 맑은 정신으로 걷고 있으나, 다른 일부는 자면서 걷고 있다. 그럼에도 너희 모두는 내가 너희에게 준 힘을 이용해서, 내가 이제 막 설명한 과정을 거쳐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고 있다. 발견하는 게 아니라 창조하고 있다.
    자, 이렇게 해서 너는 네 인생이 언제 “도약하겠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 질문에 답해주었다.
    네 인생을 “도약하게” 하려면 먼저 그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아주 명확해져야 한다. 자신이 되고 싶고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게 무엇인지 생각하라. 이에 대한 네 생각이 아주 명확해질 때까지 자꾸자꾸 생각하라. 그렇게 해서 네 생각이 아주 명확해지면, 다른 것들은 일체 생각하지 마라. 어떤 다른 가능성도 생각하지 마라.
    네 의식구조에서 부정적인 생각들을 모조리 떨쳐버려라. 모든 비관주의를 잊고, 모든 의식을 버리고, 모든 두려움을 거부하라. 애초의 창조적인 생각을 굳게 지킬 수 있도록 네 마음을 훈련시켜라.
    네 생각들이 명확하고 확고부동할 때, 그것들을 진리라고 말하기 시작하라. 그것들은 큰소리로 외쳐라. 창조력을 불러오는 위대한 명령, 곧 ‘나는I am’  이용하라.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을 진술하라. “나는”은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창조력을 지닌 진술이다. “나는”이란 말 다음에 네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 말 다음에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이든, “나는”은 그 체험들에 시동을 걸고, 그 체험들을 볼러내며, 그 체험들을 네게 가져다준다.
    우주가 아는 작동법으로 이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우주가 아는, 취할 방도로 이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우주는 호리병 속에 든 요정(아라비아 동화에 나오는 요정으로 주인이 무슨 명령을 내리든 그대로 실행한다-옮긴이)처럼 “나는”에 응답한다.

    당신은 마치 저한테 빵 한 덩어리를 잡으라고 말씀하시듯, “모든 의심을 버리고, 모든 두려움을 거부하고, 모든 비관주의를 잊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말하기는 쉬워도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네 의식구조에서 부정적인 생각들은 모조리 떨쳐버려라”는 말씀은 “점심 먹기 전에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라”는 얘기나 다를 바 없이 들립니다. 그건 실로 엄청난 주문입니다.

    생각을 길들이고 다스리는 건 보기만큼 어렵지 않다.(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고.) 그것은 오로지 훈련의 문제이고 열의의 문제이다.
    그 첫단계는 네 생각을 점검하는 법을 배우는 것, 자신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들, 어떤 것에 대해 네 가장 고귀한 관념을 부정하는 생각들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면, 다시 생각하라! 나는 네가 문자 그대로 이렇게 하길 바란다. 네가 자신이 우울하고 곤경에 빠져 있으며, 이런 상태에서는 어떤 좋은 일도 생길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다시 생각하라. 세상을 좋지 않은 사건들로 가득찬 몹쓸 곳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다시 생각하라. 자신의 삶이 조각나고 있어서 두 번 다시 그것을 도로 모을 수 없을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면, 다시 생각하라.
    너는 이렇게 하도록 자신을 훈련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도록 네가 자신을 얼마나 잘 훈련시켰는지 보라!)

    깨달음이란 어디로 갈 데가 없다는 것과,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것, 지금 있는 꼭 그대로의 자신 이외에 다른 어떤 존재도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너희는 어디에도 있지 않은 곳으로 가고 있다.
    너희가 말하는 식의 천국이란 어디에도nowhere 없다. 이 단어에서 w와 h 사이를 약간 벌려보라. 그러면 너희는 천국이 지금now....... 여기here라는 걸 알 것이다.

    기대 없이, 특정한 결과들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자유다. 그것이 바로 신성(神聖)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사는 방식이다.

    당신은 결과에 집착하지 않습니까?

    절대로 않는다. 내 기쁨은 창조에 있지 결과에 있지 않다. 극기는 행동하지 않겠다는 결정이 아니다. 극기는 특정 결과를 기대하지 않겠다는 결정이다. 여기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열정은 존재가 행동으로 바뀜을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주십시오.

    존재함beingness은 존재existence의 최고 상태다. 그것은 가장 순수한 본질이다. 그것은 “지금-지금 아님”, “전체-전체 아님”, 신의 “항상 그대로임-결코 아님”, 둘 다를 아우르는 것이다.
    순수 존재는 순수한 신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치 않았다. 우리는 늘 ‘우리가 무엇인지’ 체험하길 갈망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려면 행동이라는, 신성의 전혀 다른 측면이 필요했다.
    예컨대 너희 자아의 핵심부가 그 멋진 사랑이라는 신성의 한 측면이라고 해보자(사실 사랑이야말로 너희의 실체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것과 뭔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영혼은 자신을 체험 속에서 인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에 대해 뭔가를 하고자 갈망한다. 그리하여 영혼은 행동으로 자신의 가장 고귀한 관념을 실현시키고자 한다.
    이렇게 하려는 충동을 열정이라 한다. 열정을 죽여라. 그러면 너희는 신을 죽이게 된다. 열정이란, “여어, 안녕” 하며 인사하고 싶어하는 신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일단 신(혹은 너희 내면의 신)은 그런 식의 사랑을 하고 나면, 즉 자신을 실현시키고 나면,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반면 인간은 흔히 투자한 것에 대한 반대급부를 필요로 한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것도 좋다. 하지만 상대방에게서 그 사랑을 어느 정도 되돌려 받는다면, 그건 더 좋은 일이라는 식이다.
    이것은 열정이 아니다. 이것은 기대이다. 
    기대는 인간이 겪는 불행의 가장 큰 원천이며, 인간을 신에게서 떼내는 것이다.
    극기는 동양의 일부 신비주의자들이 삼매경이라 불러온 체험, 즉 신과의 하나됨과 신과의 합일, 혹은 신성과의 융합과 신성으로의 녹아듦을 통해 이 분리상태를 끝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극기는 결과를 거부하지만, 열정은 결코, 결코! 거부하지 않는다. 사실 선각자들은 열정이야말로 신에게 이르는 길, 자기실현으로 가는 길임을 직관으로 안다.
    만일 네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열정이 없다면 너는 전혀 사는 게 아니라는 세속의 표현조차도 이 점을 잘 드러내준다.

    “너희가 저항하는 건 지속되고 너희가 살펴보는 건 사라진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뜻을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스스로 어떤 실체성도 부여하지 않은 것에 저항할 수는 없다. 어떤 것에 저항하는 행동은 그것에 생명을 주는 행동이다. 어떤 에너지에 저항할 때, 너희는 그것이 거기에 자리잡게 한다. 저항하면 할수록 그것은 점점 더 현실이 된다. 너희가 저항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너희가 눈을 뜨고 살펴보는 것은 사라진다. 즉 그것은 그 환상적인 형태를 유지하기를 그친다. 
    만일 너희가 어떤 것을 살펴본다면, 그것을 진짜로 살펴본다면, 너희는 그것을 꿰뚫어보게 될 것이며, 그것이 너희에게 보여주던 모든 환상을 꿰뚫어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네 시야에 남는 것은 오직 궁극의 실체뿐이다. 궁극의 실체 앞에서 너희의 허약한 환상은 아무 힘도 갖지 못한다. 그것의 아귀  힘은 점점 약해져 너희를 오래 붙들 수 없다. 너희는 그것의 진실을 본다. 그리고 진실은 너희를 자유롭게 해준다.

    삶의 목적은 어딘가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삶의 의미는 너희가 이미 그곳에 있고, 예전에도 항상 있어왔다는 걸 깨닫는 것이다. 너희는 항상 순수한 창조의 순간 속에 있으며, 영원히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의미는 ‘자신’을 창조하고, 그런 다음 그것을 체험하는 데 있다.

    네가 일단 신의 의식으로까지 올라서게 되면, 너는 네가 책임져야 할 다른 사람의 영혼이란 없다는 것과, 모든 영혼이 평온하게 살길 바라는 건 칭찬받을 일이긴 하나, 각자의 영혼은 순간마다 자기 나름의 운명을 선택해야 하고 또 실제로 선택하고 있다는 걸 이해하게 될 것이다.
    물론 남을 고의로 학대하거나 파멸시키는 게 그리 고귀한 행동은 아니다. 또 자신에게 의존하는 사람들, 그렇게 하도록 네가 만들어놓은 사람들의 필요를 무시하는 것 역시 똑같이 온당치 못한 짓임도 분명하다.
    그러나 네가 할 일은 그들을 자립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에게 너 없이 살아가는 법을, 가능한 한 빨리 그리고 완벽하게 가르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너를 필요로 하는 한, 너는 결코 그들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기에. 네가 그들을 진실로 축복하는 것은 오직 그들이 너를 불필요한 존재로 느낄 때뿐이다.
    같은 의미에서 신에게 더없이 기쁜 순간은 너희가 신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깨닫는 바로 그 순간이다.
    나도 안다, 나도 안다....... 내 말이 너희가 배워온 모든 가르침과 정반대라는 걸. 너희 선생들이 가르쳐준 신은 분노하는 신, 질투하는 신, 의존하길 요구하는 신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신성(神性)을 향한 신경증적인 대용품이지, 절대로 신이 아니다.
    참된 선각자는 가장 많은 제자들을 거느린 사람이 아니다. 가장 많은 선각자를 창조하는create 사람이다.
    참된 지도자는 가장 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사람이 아니다. 가장 많은 지도자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참된 왕은 가장 많은 백성은 거느린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은 백성을 왕위로 끌어올린 사람이다.
    참된 선생은 가장 많은 지식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은 사람들이 지식을 갖도록 끌어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참된 신은 가장 많은 머슴을 거느린 존재가 아니라, 가장 많은 이들에게 봉사하는 존재, 그리하여 그들 모두를 신으로 만드는 존재이다.
    더 이상 자신의 신민(臣民)을 거느리지 않고, 신은 도달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모두가 깨닫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의 목적이요, 영광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나쁘다”는 말을 들어왔다. 너희는 자신이 “죄” 가운데서 태어났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죄책감은 일종의 길들여진 반응이다. 너희는 미처 뭔가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도 전부터 자신이 한 일에 죄책감을 느끼라는 말을 들어왔다. 너희는 완벽하지 못하게 태어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교육받아왔다.
    너희가 불완전한 상태로 세상에 태어났다고 하는 이런 억지주장이 너희 종교들이 뻔뻔스럽게도 원죄original sin라 불러온 바로 그것이다. 사실 그것은 너희의 죄가 아닌 원래의 죄original sin이다. 신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세상이, 신이  불완전한 어떤 걸 창조하거나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너희에게 덮어씌운 최초의 죄.
    너희의 몇몇 종교들은 이런 식의 오해를 중심으로 신학체계 전체를 세워왔다. 이건 문자 그대로 오해이다. 내가 창안해낸 것들과 내가 생명을 준 것들은 무엇이나 다 완벽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내 형상대로 내 닮은꼴로 만들어진 완벽함 그 자체의 완벽한 반영이다.
    그럼에도 너희 종교들은 처벌하는 신이라는 관념을 정당화하고자, 신이 화를 낼 만한 뭔가를, 모범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조차 어느 정도는 구원받아야 할 뭔가를, 만들어내야 했다. 자신이 저지른 일 때문에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면, 자신의 타고난 불완전함 때문에라도 구원받아야 하도록. (이런 종교들은 말한다) 따라서 너희는 이 모든 잘못들에 대해서 뭔가를 하는 게, 그것도 서둘러 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지옥으로 직행할 것이다.
    이것이 두렵고 복수하고 화내는 신을 달래는 데는 결국 실패하겠지만, 두렵고 복수하고 화내는 종교들에게는 생명을 불어넣어준다. 그렇게 해서 그 종교들은 오래도록 살아남는다. 따라서 권능은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체험되지 못하고 소수의 손에 집중되고 만다.
    그리하여 너희는 나와 내 힘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너희 자신과 자신의 권능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못난 생각을 하고, 왜소한 관념을 가지며, 극도로 미천한 개념을 갖는 쪽을 택한다. 너희는 그렇게 하도록 교육받아온 것이다.

    맙소사, 어떻게 하면 그런 가르침에서 벗어날 수 있나요?

    좋은 질문이다. 아주 딱 맞는 상대에게 물었고!
    이 책을 읽고 또 읽으면 그런 가르침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책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도록 하라. 모든 구절을 샅샅이 이해할 때까지, 모든 단어들에 친숙해질 때까지. 네가 여기 나온 구절들을 남들에게 인용할 수 있을 때, 가장 암울한 시기 가장 암울한 순간에 그 구절들을 마음에 떠올릴 수 있을 때, 비로소 너는 “그런 가르침에서 벗어날” 것이다.

    네가 우주에서 존재할 수 있는 것까지도(인식할 수 있는 양(量)으로서, 식별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서). 오직 다른 사람들과 다른 장소들과 다른 사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면 너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명심하라. 결국 너란 존재는 자신이 아닌 다른 것과의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거주하는 절대계와 반대되는 상대계에서의 존재방식이다.
    이점을 확실히 이해하고 깊이 파악할 수 있다면, 너희의 직관은 체험들 하나하나의 인간의 모든 만남, 특히 개별적인 인간 관계들을 축복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그것들을 가장 고귀한 건설로constructive 보게 될 것이기에. 너희는 그것들을 ‘참된 자신’을 건설하는 데 활용할 수 있고, 활용해야 하고, 또 활용하고 있다는 걸(너희가 그걸 원하든 원치 않든 상관없이) 알게 될 것이기에.
    그 건설은 너희의 의식이 설계한 장대한 창조물일 수도 있고, 또 순전히 우연히 이루어진 구성일 수도 있다. 너희는 그저 우연한 사건들의 결과로 빚어진 사람일 수도 있고, 네가 되려고 했고 하려고 했던 사건들의 결과에서 비롯된 사람일 수도 있다. 자기창조가 의식하면서 이루어지는 건 후자의 경우이고, 자신이 실현되는 것도 두 번째 체험에서이다.
    그러므로 모든 관계를 축복하라. 모든 관계를 특별한 것으로, 자신을 형성해주는 것으로 보도록 하라. 그리고 나서 이제 어떤 존재가 될지 선택하도록 하라.

    특별한 누군가가 이제 자신의 삶에 들어오고 나니, 자신이 완전해진 것 같다는 말은 아주 로맨틱하게 들리긴 한다. 그러나 관계의 목적은 너를 완전하게 만들어줄 타인을 갖는데 있는 게 아니라, 네 완전함을 함께 나눌 타인을 갖는 데 있다.
    모든 인간관계의 역설이 여기에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충분히 체험하기 위해서 특별한 타인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타인이 없다면 너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은 인간 체험의 수수께끼이자 경이이며, 불만이자 기쁨이다. 이 역설 속에서 이 역설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깊은 이해와 완벽한 의지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렇게 사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너희 대부분은 기대와 충만한 성에너지, 넓게 열린 가슴, 열의와 기쁨으로 가득찬 영혼을 가지고 관계 형성 연령층으로 들어선다.
    그러다 너희는 마흔 살에서 예순 살 사이의 어딘가에서 (대개는 후반보다는 전반기에), 자신의 가장 원대한 꿈을 포기하고, 고귀한 희망을 접어두고, 최소한의 기대나 아무런 기대도 갖지 않기로 마음을 정한다.
    문제는, 지극히 단순하고 지극히 간단하지만 지극히 비극적인 오해를 하는 데서 생긴다. 즉 너희의 가장 원대한 꿈과 가장 고귀한 이상과 가장 바람직한 소망의 실현여부가 너희의 소중한 자아가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과 관련이 있다는 오해, 그리고 너희 관계의 지속 여부가 상대방이 자신의 관념에 얼마나 잘 맞춰주고, 자신이 상대방의 관념에 얼마나 잘 맞춰주는가에 있다는 오해, 그러나 관계를 좌우하는 단 하나의 참된 시금석은 너희가 얼마나 자신의 관념에 따라 사느냐는 것이다.
    관계는 가장 고귀한 자아 개념을 체험할 수 있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기회-사실은 유일한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성스러운 것이다. 관계를 타인들에 대한, 너희의 가장 고귀한 개념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회로 볼 때, 관계는 실패로 돌아간다.
    관계 당사자들이 자신에 대해, 즉 자신이 되고 있고 하고 있고 갖고 있는 것에 대해, 자신이 원하고 구하고 주는 것, 자신이 추구하고 창조하고 체험하는 것에 대해 마음쓸 수 있게 하라. 그렇게 할 때만 관계는 관계 자체의 목적과 관계 당사자들에게 훌륭하게 봉사할 것이다.
    관계 당사자들은 상대방에 대해 일체 마음쓰지 마라. 오로지 단 한가지, 자신에 대해서만 마음쓰도록 하라.
    너희는 오로지 상대방에 대해서만 마음쓰는 것이 최상의 관계라고 들어왔을 터이니, 이런 가르침은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너희에게 말하노니, 상대방에게 초첨을 맞추는 것, 상대방에 몰두하는 것이야말로 관계를 실패로 돌아가게 만드는 이유이다.
    저 사람은 어떤 상태인가? 뭘 하고 있는가? 뭘 갖고 있는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원하는 건? 요구하는 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기대하는 건? 계획하는 건?
    선각자는 상대방의 상태와 하는 일과 가진 것과 말과 바램과 요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상대방이 뭘 생각하고 뭘 기대하고 뭘 계획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 관계에서 자신이 무엇이냐는 것뿐이다. 
    가장 잘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다.

    아주 과격한 가르침이로군요.

    주의깊게 살펴보면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남도 사랑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남에 대한 사랑을 매개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추구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자기네가 이렇게 하는 걸 깨닫지 못한다. 그것은 의식하면서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  속에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너희가 잠재의식이라 부르는 것에서 진행되는 흐름이다. 그들은 생각한다. “내가 남들을 사랑할 수만 있다면, 그들도 나를 사랑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따라서 나를 사랑할 수도 있으리라”
    이것의 역(逆)에는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자신을 싫어하는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병이다. 사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사랑해주는 데도, 그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상사병”에 걸릴 때, 이것은 일종의 병이다. 제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사랑한다고 얘기해줘도 그들은 흡족해하지 않는다.
    첫째로 그들은 상대방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방이 자기를 주무르려 한다고 생각한다. 뭔가를 얻어내려고. (어떻게 당신들이 본래 모습 그대로의 나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야, 뭔가 착각을 한 게 틀림없어. 당신들은 분명 내게서 뭔가를 원하는 거야! 자, 당신들이 원하는 게 뭐지?)
    그들이 죽치고 앉아 어떻게 자기네를 진짜로 사랑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온갖 생각을 다해본다. 상대방을 믿지 못하는 그들은 결국 상대방에게 그 사랑을 증명하도록 만드는 작전을 펼친다. 상대방은 그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이 때 그들은 상대방에게 행동방식을 바꾸라는 요구를 하기도 한다.
    두 번째로, 마침내 상대방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걸 믿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 그들은 이내 그 사랑을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상대방의 사랑을 붙들어두기 위해 자신의 행동방식을 바꾸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문자 그대로 관계 속에서 자신을 상실한다. 그들은 자신을 찾고자 관계를 맺었지만, 오히려 자신을 잃고 말았다.
    관계 속에서의 이같은 자아상실이야말로 남녀관계에서 생기는 괴로움의 주요한 원인이다.
    두 사람은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더 크리라는 기대를 품고 함께 짝을 이루지만, 오히려 더 못하다는 사실만 깨닫게 된다. 그들은 독신일 때보다 더 못한다고 느낀다. 더 무력하고, 더 맥빠지고, 더 따분하고, 더 짜증스럽고, 더 불만스럽게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예전보다 못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관계 속에 머무르고 관계를 유지하고자 자신의 대부분을 포기했던 것이다. 
    관계가 본래 뜻한 바는 결코 이런 게 아니었다. 그러나 너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관계를 체험하는 방식이 바로 이런 것이다.

    왜요? 어째서요?

    사람들이 관계의 목적과 교감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전에 한번이라도 교감했다고 치면).
    너희가 서로를 성스러운 여행길에서 만난 성스러운 영혼들로 보지 않을 때, 너희는 모든 관계 뒤에 놓인 목적, 즉 의미를 볼 수 없다.
    영혼은 진화라는 목적을 위해 몸에 깃들고 몸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너희는 진화하고 있다. 너희는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너희는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지 결정하기 위해서 모든 관계를 활용하고 있다.
    이것이 너희가 이 세상에 와서 할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을 창조하는 즐거움이고, 자신을 인식하는 즐거움이며, 자신이 되고자 하는 바를 의식하면서 일궈가는 즐거움이다. 이것이 자의식을 갖는다고 할 때의 참뜻이다.
    너희는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 알고 체험할 수 있는 도구들을 갖고자 자신을 상대계로 끌어들였다. ‘자신’이란 너희가 자신 이외의 모든 것들과 관계하기 위해 스스로 창조해 낸 존재다.

    너희는 아직도 ‘참된 자신’을 깨달으려(“실현시키려”) 애쓰는 중이다. 삶(곳 나)은 너희에게 ‘참된 자신’를 창조할 수 있는 기회를 넘칠 만큼 제공할 것이다.(삶은 발견의 과정이 아니라 창조의 과정임을 명심하라).

    손해 안보기나 최대한의 이익이란 관점에서 삶을 살면, 삶의 참된 이익은 놓치고 만다. 그럴 기회를 놓치고 그럴 가능성을 잃는다. 이런 식의 삶은 두려움으로 사는 삶이다. 이런 식의 삶은 자신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
    너희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어떤 보호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랑은 잃어버릴 수가 없다. 하지만 너희가 앞의 두가지 질문 가운데 두 번째 질문(어느 것이 이로운 선택인가라는 질문-옮긴이)에만 계속 답한다면, 너희는 결코 체험으로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얻거나 잃을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두 번째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을 이와 다른 식으로 보는 사람, 자신을 좀 더 고귀한 존재로 보는 사람, 이기거나 지는 것이 인생의 시험이 아님을 이해하는 사람, 시험은 사랑하는가 아닌가밖에 없다는 걸 이해하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첫 번째 질문을 던진다.
    두 번째 질문을 던지는 남자는 “내 몸이 나”라고 말한다. 첫번째 질문을 던지는 여자는 “내 영혼이 나”라고 말한다.
    그러니 들을 귀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들어라. 너희에게 얘기하노니, 모든 인간 관계의 결정적인 대목에는 딱 한 가지 질문만이 존재한다.

    지금 사랑은 무엇을 하려 하는가?

    이 외에 너희 영혼과 관련 있고, 의미 있고, 너희 영혼에게 중요한 다른 질문은 없다.
    이제 우리는 해석이라는 아주 미묘한 지점에 이르렀다. 사랑에 뒷받침된 행동이라는 이 원칙은 너무나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그로 인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게 했다. 사람들이 삶을 원망하고 삶에 화를 내는 것도 이런 오해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너희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남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려 하고, 그런 일을 하려  하고, 그걸 것을 가지려 하는 데서 사랑에 뒷받침된 행동이 나온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가장 고귀한 선택이란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 즉 자신을 위한 최고의 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심오한 영적 진리가 다 그렇듯이, 이런 주장은 그 자체로 즉석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을 위한 최고의 “선”이 무엇인지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본다면 오해의 소지는 훨씬 줄어든다. 그리고 그 가장 고귀한 최고의 선택이 절대적인 것일 때 수수께끼는 풀리고 순환논법은 완결되며, 너희를 위한 최고의 선이 남들을 위해서도 최고의 선이 된다.
    이런 진리를 이해하는 데만도 몇생애가 걸릴 수 있으며, 그것을 실천하는 데는 훨씬 더 많은 생애가 걸릴 수 있다. 이 진리는 훨씬 더 위대한 진리, 즉 ‘너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 곧 남들을 위해 하는 것이고, 남들을 위해 하는 일이 너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라는 진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너와 남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너말고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의무도, 어떤 제한이나 한계도, 어떤 지침이나 규칙도 없다. 어떤 환경이나 상황도 너희를 구속하지 않고, 어떤 법전이나 법률도 너희를 제한하지 않는다. 너희는 어떤 죄로도 벌받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너희를 벌줄 수 없다. 신의 눈에는 “죄지음” 같은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계를 맺고 유지할 때 의무감에서 뭔가를 해서는 절대 안된다. 네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 관계가 ‘참된 자신’을 판단하고 ‘참된 자신’이 되게 해주는 영광스런 기회란 점에서 그렇게 하라.

    만일 너희 둘 다가 너희 관계의 목적이 의무가 아니라 기회를 창조하는 것, 즉 성장할 기회, 자기표현을 충분히 할 기회, 자신의 삶을 그 최고잠재력으로까지 끌어올릴 기회, 너희가 자신에 대해 지금껏 가져왔던 모든 잘못된 생각과 열등한 관념들을 치유할 기회, 너희 두 영혼의 교류를 매개로 신과 궁극적으로 재결합할 기회를 창조하는 것임에 의식적으로 동의한다면, 너희가 이제껏 해왔던 식의 맹세가 아니라 내가 방금 말한 식의 맹세를 한다면, 그 관계는 아주 멋진 음조(音調)로 시작될 것이다. 그것은 박자가 잘 맞는 발걸음을 떼기 시작할 것이며, 대단히 순조로운 출발이 될 것이다.

    네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말고, 할 기회가 주어진 일을 하도록 하라.

    뿌리 생각root thought 혹은 받침 생각을 바꾸는 가장 빠른 방법은 생각-말-행동의 순서를 뒤집는 것이다.

    어떻게요?

    뭔가에 관해 새로운 생각을 갖고 싶으면 먼저 행동하라. 뭔가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갖고 싶으면 먼저 말을 하라. 충분할 만큼 자주 이렇게 하라. 그러면 너희는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게끔 네 마음을 길들일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길들인다구요? 마인드 컨트롤 같은 건가요? 그건 단지 정신 조작일 뿐이잖아요?

    네 마음이 어떻게 해서 지금의 생각들을 갖게 되었는지 아느냐? 지금처럼 생각하게끔 너희 세상이 네 마음을 조작해왔다는 걸 모르겠느냐? 세상이 네 마음을 조작하는 것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조작하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
    남들이 바라는 대로 생각하기보다는 네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는 게 더 낫지 않는가? 반응하는 생각보다는 창조하는 생각으로 무장하는 편이 더 낫지 않는가?
    하지만 너희의 마음은 반응하는 생각, 곧 남들이 체험에서 나온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 너희 생각들 중에서 자신이 만든 자료에서 나온 생각은 극히 적다. 스스로 설정한 우선순위에 따르는 생각은 더더욱 적고.
    너 자신의 돈에 대한 뿌리 생각이 그 전형적인 예다. 돈에 대한 네 생각(돈을 나쁘다)은 네 체험(돈을 갖는 건 멋진 일이다!)과 정면으로 대립하다. 그리하여 너는 자신의 뿌리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의 체험을 발뺌하고 그것에 대해 거짓말을 해야 한다.
    너는 이런 생각에 너무 뿌리박혀 있어서 돈에 관한 자신의 관념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 같은 건 전혀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일부 자료나마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뿌리 생각을 바꾸는 방법이며, 그것을 남들의 생각이 아닌 너 자신의 뿌리 생각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그런데 네게는 돈과 관련된 뿌리 생각이 또 하나 있다. 내가 이미 언급했던 것이지만.

    그게 뭔데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 사실 너는 무엇에 대해서건 간에 이런 뿌리 생각을 갖고 있다. 돈이 충분치 않다, 시간이 충분치 않다, 사랑이 충분치 않다, 음식과 물이 충분치 않다, 이 세상에는 자비가 충분치 않다....... 설사 좋은 게 있다 하더라도 그걸로는 충분치 않다.
    “충분치 않음”의 이 집단의식이 너희가 보는 대로의 세상을 창조하고 재창조하고 있다.

    새로운 생각은 네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다. 그것은 네가 진화하고 성장하고 ‘참된 자신’이 될 수 있는 단 하나의 실제 기회다.
    지금 네 정신은 낡은 사고들로 가득차 있다. 낡은 사고들일 뿐 아니라, 대부분 다른 사람들의 낡은 사고들로, 뭔가에 대한 네 마음을 바꾸자면 지금이 중요하다. 지금이 기회다. 이것이 바로 진화라는 것이다.

    행동은 몸의 기능이다. 존재는 영혼의 기능이다. 몸은 항상 뭔가를 하고 있다. 하루하루 순간순간마다 몸은 뭔가에 매달려 있다. 몸은 결코 멈추지 않고, 결코 쉬지 않으며, 끊임없이 뭔가를 한다.
    그것은 영혼의 지시에 따라 하는 행동이기도 하고, 영혼의 지시를 무시한 행동이기도 한다. 너희의 삶의 질은 그 균형에 달려 있다.
    영혼은 영원한 존재이다. 영혼은 몸이 하는 일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뭘 하든 상관없이 존재한다.
    만일 너희가 삶을 행동과 관련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너희는 자신이 뭘하는지 모르고 있다.
    너희의 영혼은 너희가 생존을 위해 뭘 하든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너희의 생이 끝나고 나면 너희 역시 개의치 않을 것이다. 너희의 영혼은 너희가 뭘 하든, 그걸 하는 동안 너희가 무엇이 되고 있는가에만 관심을 갖는다.
    영혼이 관심을 갖는 건 행동 상태가 아니라 존재 상태다.

    존재는 존재를 부르고, 체험을 낳는다.
    너희는 자신의 몸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려고 이 행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자신의 영혼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려고 이 행성에 존재한다. 너희 몸은 그저 영혼의 도구일 뿐이고, 너희 마음은 몸을 움직이는 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서 너희는 일종의 동력도구(전기나 휘발유엔진의 힘으로 움직이는 도구-옮긴이)를 갖고 있는 셈이다. 영혼이 자신이 바라는 것들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동력도구를.

    영혼의 기능은 자신의 바램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다.
    마음의 기능은 여러 가지 대안들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몸의 기능은 그 선택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 조화롭게 하나가 되어 함께 창조할 때, 신은 현실 속에서 구현된다. 
    그럴 때 영혼은 자신의 체험 속에서 스스로를 인식하다.

    “나”라는 말은 창조의 엔진에 시동을 걸어주는 열쇠다. “나는”이라는 두 단어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그 말들은 우주에 보내는 진술이며, 명령이다.
    이제 “나”라는 말(이 말은 ‘위대한 나the Great I Am'를 불러들인다) 뒤에 따라오는 건 뭐든지 현실에서 그대로 실현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나” + “성공을 원한다want”는 성공이 모자라는wanting 너를 만들어 내며, “나” + “돈을 원한다”는 돈이 모자라는 너를 만들어낸다. 생각과 말에는 창조력이 있기에 다른 결과를 나올 수 없다. 행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일 네가 성공과 돈을 원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네 생각과 말과 행동은 서로 일치되고, 따라서 너는 확실히 이것들이 모자라는 체험을 갖게 된다.

    맙소사! 정말로 그렇게 되나요?

    물론이다. 너희는 강력한 힘을 지닌 창조주다. 그런데 너희가 예컨대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서 딱 한번 한 생각이나 말이라면, 그것들이 그대로 현실이 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너희가 가끔 그러하듯이 “뒈져라!”거나 “지옥에나 가버려!”라거나, 그밖에 고상하지 못한 말들을 생각하거나 뱉었다고 염려할 필요는 없다.

    그거 고맙군요. 

    천만에. 그러나 너희가 어떤 생각이나 말을 자꾸자꾸 되풀이한다면, 한두번이 아니라 몇십번, 몇백번, 몇천번 되풀이한다면, 그것들의 창조력이 얼마나 엄청날지 생각해봤는가?
    자꾸자꾸 되풀이된 생각이나 자꾸자꾸 표현된 말은 표현된 꼭 그대로 된다. 즉 생각하거나 말한 그대로 밀려나온다는 말이다. 그것은 외부로 나와 실현된다. 그것은 너희의 현실이 된다.

    비극이군요.

    그 말이 흔히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이것, 비극이다. 너희는 비극을 사랑하고 삶의 드라마를 사랑한다. 너희가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을 때까지 너희는 그렇게 한다. 그러나 언제고 너희의 진화과정에서 드라마를 사랑하고, 너희가 살아온 “이야기”를 사랑하는 걸 그만둘 시점이 온다. 그때가 바로 너희가 그것을 바꾸기로 결정하는 때, 꼭 바꾸기로 선택하는 때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 방법을 모를 뿐이다. 하지만 이제 너는 알고 있다. 네 현실을 바꾸려면 그냥 그런 식으로 생각하길 그만두면 된다.
    네 경우라면 “나는 성공을 원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는 성공했다”고 생각하도록 하라.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서 네가 진실로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하라! 그 외에 다른 건 일체 하지 마라! 네게는 시간이 거의 없다. 어떻게 생계를 위해 네가 좋아하지 않는 일에 시간을 낭비할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무슨 그 따위 삶이 있단 말인가? 그건 사는 게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다!
    만일 네가, “하지만, 하지만....... 제게는 딸린 식구들이 있습니다....... 먹여살려야 할 어린 것들이 있고....... 저만 쳐다보는 아내가 있습니다.......”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리라. 만일 네가 몸이 하는 일을 삶이라고 주장한다면, 너는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너를 기쁘게 해줄 일,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일을 하도록 하라.
    그러면 최소한 네 기쁨을 방해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향한 원망과 분노에서는 벗어날 수 있으리라.
    네 몸이 하는 일이 하찮다는 건 아니다. 그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식으로는 아니다. 몸의 활동은 어떤 존재상태에 이르고자 시도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어떤 존재상태를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만사가 제대로 질서잡혀 있다면 사람은 행복해지려고 뭔가를 하는 게 아니다. 누구나 행복하다. 그래서 뭔가를 하는 것이다. 자비로워지려고 무슨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자비롭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 의식이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영혼의 결정이 몸의 행동보다 먼저 이루어진다. 의식 없이 행동하는 사람만이 몸이 하는 일을 매개로 영혼의 상태를 만들어 내고자 한다.
    “네 몸이 하는 일이 삶은 아니다”란 내 진술이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그럼에도 네 몸이 하는 일이 네 삶의 현상태를 반영해주는 건 사실이다.
    이것은 또 다른 신성한 이분법이다.
    그러나 다른 건 다 못하더라도 이것만은 알아둬라.
    자식이 있건 없건, 배우자가 있건 없건 간에 누구나 기쁨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찾아내라! 그러면 네 가족들은 네가 돈을 벌고 못벌고에 상관없이 기쁨에 찬 가족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기뻐하지 않고 일어나 네 곁을 떠나려 한다면, 그들 나름의 기쁨을 찾을 수 있게 사랑으로 그들을 떠나보내라.
    한편, 만일 네가 몸의 일들에 아무 관심도 없는 정도로까지 성숙해지면, 너는 하늘에서 그러한 것처럼 이 지상에서도 훨씬 더 자유롭게 자신의 기쁨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신은 행복한 건 좋은 일이라고, 자신이 하는 일에서 행복해하는 것까지도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네가 이제까지 해온 일은 바로 ‘자신이 누구인지’에 관한 진술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너는 왜 그런 일을 하는가? 
    그 일이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라 생각하는가?
    네가 꼭 해야 하는 일이란 건 없다.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의 행복까지 희생하면서 가족을 부양하는 사내가 ‘자신’이라면, 네가 하는 일을 사랑하도록 하라. 그렇게 하는 게 네가 창조하는, 네 자신을 생생하게 진술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책임이 주어졌을 때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기가 싫어하는 일이라도 열심히 하는 여자가 ‘자신’이라면, 네 일을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그렇게 하는 게 네 자아 이미지, 네 자아 개념을 뒷받침해줄 터이니.
    누구든 간에 자기가 무슨 일을, 왜 하고 있는지 깨닫는다면,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다.
    스스로가 원치 않는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걱정은 마음의 활동 중에서 미움 다음 가는 나쁜 것으로, 거의 최악이라 해도 좋을 만큼 자신을 심하게 파멸시키는 형태이다. 걱정은 일정한 초점 없이 정신 에너지를 쓸데없이 허비하게 만든다. 그것은 또 몸에 해를 주는 생화학 반응들을 창조하여, 소화불량에서 관상통맥 폐색까지 온갖 병들을 일으킨다.
    걱정을 그만두면 건강은 이내 좋아질 것이다.
    걱정은 마음이 자신과 나(神)의 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할 때 보여주는 마음의 행동이다.
    미움은 가장 위험스런 정신상태이다. 그것은 몸에 독을 퍼뜨려, 사실상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빚어낸다.
    두려움은 ‘너희’의 모든 것에 맞서는 대립물이다. 따라서 그것은 너희의 정신 건강과 육체 건강에 대립하는 결과를 낳는다. 두려움은 걱정이 증폭된 것이다.
    걱정과 미움과 두려움은, 그 파생물들인 불안, 애달픔, 성마름, 탐욕, 불친절, 심판하기, 비난 따위와 함께 어느 것이나 몸세포들을 공격한다. 이런 조건에서 건강한 몸을 갖기란 불가능하다.
    자만심, 방종, 욕심 같은 것들은 앞의 것들보다 다소 덜하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신체의 질병이나 불편을 가져온다. 
    모든 병은 무엇보다 먼저 정신에서 창조된다.

    너희는 죽게 되어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너희의 물질 형상은 너희가 마음으로 창조해낸 현실을 체험하고, 너희가 창조해낸 자아를 영혼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더없이 훌륭한 이기(利器)이자 경이로운 도구이며 영광스런 매개체로 창조되었다.
    영혼은 고안하고conceive, 마음은 창조하고 몸은 체험한다. 그 순환구조는 완벽하다. 그러고 나서 영혼은 자신의 체험 속에서 자신을 인식한다. 만일 영혼이 자신이 체험하는(느끼는) 것을 좋아하지 않거나, 무슨 이유에서인가 다른 체험을 바란다면, 영혼은 그저 새로운 자아 체험을 고안해내서, 문자 그대로 자신의 마음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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