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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과 나눈 이야기 book 3
    나의 서재 2024. 3. 30. 21:21

     

    book 3

    네 삶에서 일어난 일들 모두가, 너나 너와 관련된 영혼들이 성장하기 위해서 필요로 했고 원했던 바로 그 방식으로, 너희가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어났던 완벽한 사건들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두려움과 죄의식이야말로 너희의 유일한 적이다. 너희의 참된 친구는 사랑과 자각이다. 전자를 후자와 혼동하지 않도록 하라. 전자는 너희를 죽이고 말겠지만, 후자는 너희에게 생명을 준다.

    그렇다면 제가 무엇에도 “죄의식”을 느껴선 안 된다는 겁니까?

    절대로, 어떤 경우에도. 그렇게 해서 뭐 좋은 게 있는가? 죄의식은 너희가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들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기회를 빼앗을 뿐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요?

    두려움과 조심은 다르다. 조심하라, 다시 말해 의식하라, 하지만 두려워하지는 마라. 의식은 움직이게 하지만, 두려움은 마비시킬 뿐이니.
    마비되지 말고 움직여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뭔가(더 많은 시간, 돈, 사랑 혹은 다른 뭔가)를 “가진다면”, 비로소 자신들이 뭔가(책을 쓰고, 취미를 키우고, 휴가를 가고, 집을 사고, 관계를 감당하는 따위의)를 “할” 수 있고, 그것은 자신을 뭔가가 “되게”(행복하게, 평온하게, 만족스럽게, 애정 깊게) 해줄 거라고 믿는다.
    그들은 사실상 ‘존재-행위-소유’의 패러다임을 뒤집고 있다. 본모습대로의 우주에서는 (너희 생각과는 반대로) “가짐”은 “됨”을 낳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먼저 소위 “행복한”(혹은 “알”거나 “현명하”거나 “자비로운” 따위의) 상태가 “되고” 나서, 이 되어 있음의 자리에서 뭔가를 “하기” 시작하라. 그러면 얼마 안 가 너희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너희가 항상 “갖고” 싶어하던 그것을 가져다주면서 끝맺는다는 걸 발견할 것이다.
    이 창조하는 과정(바로 이런 게....... 창조과정이란 것이다)을 작동시키는 방식은, 먼저 너희가 “갖고” 싶은 게 뭔지 살펴보고, 그것을 “가진다면” 자신이 어떻게 “될” 것 같은지 자문해본 다음, 곧 바로 그런 되어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너희는 지금껏 써오던 ‘존재-행위-소유’의 패러다임을 뒤집어-실제로는 그것을 바로 세워-, 우주의 창조력에 맞서지 않고 오히려 그것과 더불어 움직일 수 있다.
    이 원리를 진술하는 지름길은 이렇다.
    너희가 삶에서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문제는 자신이 무엇이 되고 있는가뿐이다.

    하지만 행복해“지기” 위해서나 다른 어떤 되려는 것들, 예를 들면 더 풍족해지거나 더 사랑받게 “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갖고 있지 않은데, 어떻게 그렇게 “되어 있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까?

    그런 듯이 행동하라. 그러면 너는 그것을 자신에게 끌어올 것이다.
    너는 네가 그런 체하는 것이 된다.

    다른 말로 하며, “성공할 때까지 성공한 척하라”는 거군요.

    그래, 그 비슷한 것, 다만 너희가 진짜로 “척하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진지하게 행동해야 한다.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을 진지하게 하라. 그러지 않고서는 그 행위가 가져다줄 이로움을 잃고 말리니.
    이것은 내가 “너희에게 상 주려” 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너도 알다시피, 신은 “상도 벌도 주지” 않지만, 자연법칙이 창조과정을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과 영spirit이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서 통일되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을 위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남에게 주어라.
    네가 행복해지기를 원하면, 남을 행복하게 만들고,
    네가 풍족해지기를 원하면, 남을 풍족하게 만들어라.
    또 네가 삶에서 더 많은 사랑을 원한다면, 남들이 그들의 삶에서 더 많은 사랑을 갖게 만들어라.
    진지하게 이렇게 하라. 사리사욕을 구해서가 아니라, 남들이 그렇게 되기를 네가 진심으로 원해서. 그러면 네가 내주는 모든 것이 네게 되돌아오리니.

    대부분의 진보된 종과 사회들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먹이고 훈련시키고, 지혜와 가르침과 그들 나름의 전통을 아이들에게 전수해주는 건 연장자들이다.

    너희 사회가 지닌 문제들 중 다수의 근저에 깔린 뿌리 생각이 배우자와 자식들을 개인 소유물, 말하자면 “내 것”으로 보는 이런 관념이다.

    삶 자체가 그러하듯 진리도 변하고 자라고 진화한다는 것, 그리고 너희가 진화과정이 멈췄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사실 그것은 멈춘 게 아니라 그제서야 참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너희 영혼의 목적, 그것이 몸으로 오는 까닭은 ‘참된 자신’이 되고 ‘참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영혼은 이렇게 하기를, 자신과 자신의 체험을 알기를 갈구한다.
    알고자 하는 이런 갈구가 바로, 되기를 추구하는 삶이다 This yearning to know is life seeking to be.

    너희 이야기, 세상의 모든 드라마는 너희가 자신의 체험으로 자신이 누군지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창조되었다. 또한 그것은 너희가 ‘자신이 누군지’ 잊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그래서 너희가 다시 한번 ‘자신이 누군지’ 기억해내고, 그런 자신을 창조할 수 있도록.

    가장 고귀한 성질의 기쁨은 너희더러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를 바로 지금 여기서 체험으로 창조하게끔 만들고, 다음 번의 가장 높은 장대함의 수준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재창조하고, 재창조하고, 다시 또 창조하게끔 만드는, 바로 그런 측면의 기쁨이다. 신의 가장 큰 기쁨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가장 저급한 성질의 기쁨은 너희더러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를 잊게끔 만드는, 바로 그런 측면의 기쁨이다. 그러니 그 저급함을 비난하지 마라. 그것이 없었다면 고귀함도 체험할 수 없었을 테니.

    기도의 최고 형태가 생각의 조절이다. 그러니 오직 좋은 것, 바른 것만을 생각하라. 부정과 어둠 속에 머물지 마라. 그리고 상황이 암울해 보이는 순간들이라도, 아니 특히 그런 순간들일수록, 오직 완벽만을 보고 오직 감사만을 표현하라. 그런 다음에는 너희가 다음 번에 드러내고 싶은 완벽이 무엇일지만을 상상하라.
    이 공식 속에 차분함이 있고, 이 과정 속에 평온함이 있으며, 이 깨달음 속에 기쁨이 있다.

    삶의 모든 것이 운동이다. 바위조차 운동으로 가득하다. 모든 것이 움직인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움직이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운동한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한 순간에서 그 다음 순간까지 똑같은 건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똑같이 남는 것, 혹은 똑같이 남으려 하는 것은 삶의 법칙에 맞서는 것이니, 이건 어리석은 짓이다. 이 투쟁에서는 언제나 삶이 이길 것이다.
    그러니 변하라! 그렇다, 바꾸어라! “옳고” “그름”에 대한 너희의 견해를 바꾸고, 이것과 저것에 대한 너희의 관념을 바꿔라. 너희 뼈대를 바꾸고, 너희 체계를 바꾸고, 너희 모델을 바꾸고, 너희 이론을 바꾸어라.
    가장 심오한 너희 진실들도 바뀌게 놔둬라. 부디 그것들을 너희가 손수 바꿔라. 나는 완전히 말 그대로의 뜻으로 말하고 있다. 부디 그것들을 너희가 손수 바꿔라.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상 속에 성장이 있고, ‘있는 그대로“에 대한 새로운 발상 속에서 진화가 촉진된다. 그것이 누구고, 무엇이고, 어디고, 언제고, 어떻고, 왜 그런가에 대한 너희의 새로운 발상 속에서 수수께끼가 풀리고, 음모가 드러나며, 이야기가 끝난다. 그러면 너희는 새로운 이야기, 더 멋진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어떤 것에 대한 새로운 발상 속에는 흥분이 있고 창조가 있다. ‘너희 안의 신’이 뚜렷이 드러나 충분히 실현되는 지점 또한 여기다. 
    너희 생각에 아무리 “좋았다”고 보이는 상황이라도 더 좋아질 수 있고, 너희 생각에 아무리 근사해보이는 신학과 이데올로기와 우주철학이라도 훨씬 더 큰 경이로 충만할 수 있다. “천지간에는 너희의 지혜로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열려 있으라, 열려 있으라. 너희가 옛 진리로 편안했다 해서, 새로운 진리의 가능성까지 닫아버리지는 마라. 삶은 너희의 안전지대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성급하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마라. 차라리 판단을 피하고자 하라. 다른 사람의 “그름”은 어제 아침 너희의 “옳음”이었고, 다른 사람의 잘못은 지금은 바로잡은 과거의 너희 행동이며, 다른 사람의 선택과 결정들이 “상처주고” “해롭고” “이기적이고” “용서할 수 없”듯이 너희 자신의 허다한 선택과 결정들도 그러했으니.
    다른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을” 때, 너희는 자신이 어디서 왔고, 자신과 그 사람 둘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잊고 있다.
    그리고 너희 중에 자신을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자신이 하잘 것 없고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말하노니, 너희 중 영원히 길을 잃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너희 모두, 모두가 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고, 너희 모두, 모두가 진화를 체험해가는 중이기에.
    이것이 내가 꾀하는 일이다.
    너희를 통해.

    모든 것들의 완벽과 접하길 구하라. 너희가 ‘참된 자신’을 창조하기 시작할 때, 너희는 자신이 선택하는 바를 정확히 체험할 수 있는 바로 그곳에 정확히 있게 될 것임을 알라.
    모든 것에서 완벽을 보는 것, 이것이 평화로 가는 길이다.
    마지막으로 어떤 것에서 “벗어나려” 애쓰지 마라. 너희가 저항하는 건 지속된다.

    심령“력”을 발달시키는 첫 번째 조치는, 네가 그것을 갖고 있음을 알고, 그것을 쓰는 것이다. 네가 갖는 모든 예감, 네가 느끼는 모든 느낌, 네가 경험하는 모든 직관의 “때림”에 주의를 기울여라. 주의를!
    그런 다음에는 네가 “아는” 것에 따라 행동하라. 네 마음이 거기서 벗어나라고 속삭이지 못하게 하고, 네 두려움이 너를 거기서 끌어당기지 못하게 하라.
    네가 두려워하지 않고 직관에 따라 더 많이 행동할수록, 네 직관은 너를 더 많이 도와주리니. 그것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거늘, 너는 이제야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는구나.

    너는, 사람들이 지닌 많은 종교들이 두려움에 근거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 종교들의 가르침에서는 숭배하고 두려워해야 할 신에 대한 교리가 중심이다.
    너희 지구사회 전체가 모권제에서 부권제로 개조된 것이 두려움을 통해서였고, 초기 성직자들이 사람들더러 “악한 행실을 회개하고 주의 말을 명심하게” 만든 것이 두려움을 통해서였으며, 교회가 교인들을 획득하고 통제한 방식 역시 두려움을 통해서였다.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지 않으면 하느님이 너희를 벌하시리라고 주장한 종파까지 있다. 그 종파는 교회에 가지 않는 게 죄라고 선포했다.
    그렇다고 아무 교회나 가서는 안되고, 특정 종파의 교회에만 다녀야 했다. 다른 종파의 교회에 가는 것, 그것도 죄였다. 이것은 순전히 두려움을 이용해서 통제하려는 시도였다. 놀라운 건 그것이 들어먹혔다는 사실이다.

    환생은 내가 이 우주에 놓아둔 의식 있는 다른 몇백만의 창조물들과 너희를 통해, 수많은 생애에 걸쳐 ‘나 자신’을 창조하고 체험한다는 그 목적에 딱 들어맞는다.

    동물들도 영혼을 갖고 있습니까?

    동물의 눈 속을 한번이라도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 동물이 우리 할머니, 우리집 고양이로 돌아온 할머니가 아니란 걸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과정’은 진화, 자기 창조와 진화다. 그리고 진화는 한쪽 방향으로만 진행된다. 위로, 계속해서 위로만.
    영혼의 가장 큰 바램은 자신의 더 고귀한 측면들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영혼은 진화 눈금을 따라 위로 올라가려 하지, 아래로 내려가려 하지 않는다. 영혼이 소위 열반이라 부르는 것-‘전체’인 나와의 완전한 ‘하나됨’-을 체험할 때까지는.

    죽음은 절대 끝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시작이다. 죽음은 문 열림이지, 문 닫힘이 아니다.
    삶이 영원하다는 걸 이해할 때, 너희는 죽음이 환상, 계속해서 너희가 몸을 무척 염려하도록 만듦으로써 너희 몸을 너희라고 믿게 만드는 환상임을 이해한다. 하지만 너희는 몸이 아니니, 몸의 파멸은 너희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죽음은, 너희에게 진짜인 건 삶임을 가르칠 테고, 삶은 피할 수 없는 건 죽음이 아니라 무상성(無常性)impermanence임을 가르친다. 
    무상성만이 유일하게 진리다.
    항상 그대로인 건 없다. 천지만물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어떤 것이 항상 그대로라면, 그것은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항상성permanence이라는 개념 자체도 뭔가가 의미를 가지려면 무상성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항상성조차 무상하다. 이것을 깊이 살펴보고, 이 진리를 응시하라. 그것을 이해하라, 그러면 신을 이해하리니.
    이것이 법(法)이요, 이것이 부처다. 이것은 부처 법이다. 이것은 가르침이자 스승이요, 교훈이자 선각자다. 이것은 둥글게 말려서 하나가 된 대상이자 관찰자다.
    그것들이 하나 아니 다른 것이었던 적은 없다. 삶이 눈앞에서 펼쳐질 수 있도록 그것들을 펼친 건 너희였다.
    그러나 너희 앞에 펼쳐진 자신의 삶을 볼 때, 너희 자신이 끌러지게 하지는 마라. 자신을 묶어둬라! 환상을 보고 그것을 즐겨라! 하지만 환상이 되지는 마라!
    너희는 환상이 아니라 그것의 창조자다.
    너희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이지, 이 세상 출신이 아니다.

    생물학적 명령은 더 많은 생명life을 창조하라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삶life을 체험하라는 것, 다시 말해 ‘하나됨’의 발현이라는 그 본모습대로 삶을 체험하라는 것이다.

    너희가 하는 것이 무엇이든, 섹스를 하든, 아침을 먹든, 일하러 가든, 해변을 걷든, 줄넘기를 하든, 좋은 책을 읽든, 그야말로 뭘 하든, 온전한 존재로서, 너희의 온전한 존재로서 그 일을 하라.
    너희가 아래쪽 차크라 중심에서만 섹스를 한다며, 너희는 뿌리 차크라에서만 움직이면서 훨씬 더 영광스런 체험부분을 놓치고 있다. 하지만 너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존재이고, 그리고 너희가 그렇게 되고 있는 동안, 일곱 에너지 중심 모두로부터 오고 있다면, 그때 너희는 절정을 체험할 것이다. 이것을 어찌 성스럽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그렇겠죠. 그런 체험이 성스럽지 않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죠.

    그러니 생명 에너지를 네 몸을 거쳐 정수리 차크라로 끌어오리라는 권유는 너희더러 회음부에서 떨어지라는 제안이나 요구가 되고자 했던 게 아니다.
    너희가 가슴 차크라, 나아가 정수리 차크라로까지 에너지를 끌어올렸더라도, 이것이 너희 회음부 차크라에는 에너지가 있을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너희는 사실상 끊어지고 만다 disconnected.
    생명 에너지를 너희의 위쪽 중심들로 끌어올렸을 때, 너희는 다른 사람과 소위 성적 체험이라 부를 만한 것을 가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너희가 그런 체험을 갖지 않는다 해도, 성스러움에 대한 어떤 우주법칙을 어기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또 그런 체험을 갖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너희를 더 “승격시켜”주지도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너희가 다른 사람과 섹스하기를 택한다 해도, 그것이 너희를 뿌리 차크라 수준만으로 “낮추지도” 않을 것이다. 너희가 회음부에서 끊어지는 것과 반대로 정수리에서 끊어지지 않는한.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권유, 훈계가 아닌 권유를 너희에게 하고자 한다.
    너희의 생명력인 에너지를 매순간마다 가능한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려라. 그러면 너희는 승격될 것이니, 이것은 섹스를 하거나 하지 않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은 너희가 뭘 하든 의식을 끌어올리는 것과 관계가 있다.

    매일의 명상은 너희가 이것을 이룰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하지만 그것은 실행과 헌신을 요구하고, 외부 보상이 아니라 내면 체험을 추구하겠노라는 결단을 요구한다.

    너희는 “되찾으려고”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다. 너희는 오직 “내주는” 것만 염려하면 된다. 삶은 최상질의 가짐이 아니라 최상질의 줌을 창조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너희는 계속해서 잊고 있다forgetting. 하지만 삶은 “갖기 위한 것”for getting이 아니라 “주기 위한 것”for giving이니, 그렇게 하려면 남들을 용서해야forgiving 한다. 특히나 너희가 가지려 했던 것을 너희에게 주지 않았던 사람들을!
    이런 방향 전환은 너희 문화의 내력을 완전히 뒤바꿀 것이다. 지금 너희 문화에서는 소위 “성공”이란 걸 주로 자신이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로, 얼마나 많은 명예와 돈과 권력과 소유물들을 모았는가로 재지만, 새로운 문화에서는 남들에게 얼마나 많이 모으게 했는가로 “성공”이 재어질 것이다.
    아이러니는, 남들에게 더 많이 모으게 할수록, 너희는 애쓰지 않고도 더 많이 모으리란 것이다. “약속된” 것을 서로에게 주라고 너희는 강요하는 어떤 “계약”도, 어떤 “합의”도, 또 어떤 “거래”나 “협상”이나 소송이나 재판도 없이.
    미래 경제에서 너희는 일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신의 성장을 위해서 일할 것이고, 그것이 너희의 이득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너희가 참된 자신의 더 크고 더 숭고한 해석으로 되어감에 따라 물질적인 의미에서의 “이익”도 너희에게 다가올 것이다.

    한 문화의 진화 정도는 그것이 어떤 존재나 어떤 행동에 “수치스럽다”거나 “죄 많다”는 딱지를 얼마나 많이 붙이는가로 알 수 있다.

    어떤 행동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다고요? 무슨 짓을 하든 아무 죄의식도 없고요?

    내가 이미 말했듯이 옳고 그른 건 존재하지 않는다.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 또한 귀한 것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부유해진다. 고진재와 인간의 유일한 차이점은 고진재들이 “부유함”을 규정하는 방식이다. 고진재는 “이윤을 올릴” 필요 없이 모든 것을 공짜로 나눠주는 것에서 “부유하다”고 느낀다. 사실 이런 느낌 자체가 이윤이다.

    내가 이미 설명했듯이 오직 ‘한 영혼’, ‘한 존재’, ‘한 본체’만이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단일 본체는 우주 속의 만물, 달리 말하면 존재 전체로 자신을 “개별화한다”. 여기에는 지각 있는 모든 존재들, 즉 너희가 영혼이라 부르기로 한 것도 들어간다.

    그러니까 “신”은  “존재하는” 모든 영혼입니까?

    지금 존재하고 있고, 이제껏 존재했으며, 앞으로 존재할 모든 영혼.

    그렇다면 신은 “집합체”입니까?

    나는 그 용어를 선택했다. 그것이 너희 언어로 그 상황을 가장 가깝게 묘사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경외스런 단일 존재가 아니라 집합체라고요?

    꼭 이것 아니면 저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칸 밖에서” 생각하라!

    양쪽 다가 신인가요? 개별 부분들의 집합체인 경외스런 단일 존재요?

    훌륭하다! 아주 훌륭하다!

    그럼 그 집합체는 왜 지구로 왔습니까?

    1권에서 이미 자세히 설명했듯이, 자신을 물질성으로 체험하고, 자신의 체험으로 자신을 알고, 신이 되기 위해서.

    당신은 당신이 되게 하려고 우리를 창조하셨습니까?

    사실 우리는 그랬다. 너희는 바로 그 때문에 창조되었다.

    어떤 집합체가 인간을 창조했다고요?

    번역이 바뀌기 전에 너희 성경은, “우리,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와 닮은꼴로 인간을 창조하자”로 되어 있었다.
    삶이란 신이 자신을 창조하고, 그런 다음 그 창조물을 체험하는 과정이다. 이 창조과정은 영원히 계속된다. 그것은 항“시” 일어나고 있다. 상대성과 물질성은 신이 일하는 도구들이다. ‘신’이란 건 순수 에너지(너희가 영spirit이라 부르는 것)다. 이 본체가 사실 ‘성령’이다.
    에너지가 물질이 되는 과정이 영을 물질성으로 육화(肉化)시킨다. 그 에너지는 말 그대로 자신의 속도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자신의 파동-너희라면 진동이라 불렀을-을 바꾸는 것으로, 이렇게 한다.
    전부인 것은 일부분씩 나누어 이렇게 한다. 다시 말해 전체의 부분부분이 이렇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개별화된 영이 너희가 혼soul이라 부르는 것이다.
    사실 존재하는 건 자신을 다시 모양짓고 다시 만드는 오직 ‘한 영혼’뿐이다. 이것을 재형성Reformation이라 부를 수도 있다. 너희 모두는 형성 중인 신Gods in Formation이다(신의 정보God's information!)
    바로 이것이 너희의 기여다. 그 자체로 충분한 기여다.
    이것은 단순하게 표현하면, 물질형상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너희는 이미 할 바를 다 했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너희는 공동선에 기여했다. 너희는 공통된 그것이, 그 ‘한 공동 요소’가 좋은 것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었다. 너희도, 신이 하늘과 땅과 땅 위를 걸어다니는 짐승들과 공중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들을 창조하시니, 그것이 대단히 좋았노라고 적지 않았느냐?
    “좋음” 역시 그 대립물 없이는 체험으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기에, 너희는 좋음의 역운동, 즉 반대방향인 나쁨도 창조해냈다. 또 너희는 삶의 대립물로서 소위 죽음이라 부르는 것도 창조해냈다. 
    하지만 죽음은 궁극의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희가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 이용하는 단순한 조작물, 발명품, 가상 체험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쁨”evil의 철자를 거꾸로 적으면 “산다”live가 되는 것이다! 언어면에서 너희는 참으로 현명하여,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감춰진 지혜들을 그 속에 집어넣었다.
    이 우주철학 전체를 이해할 때, 너희는 위대한 진리를 이해하게 되리니, 그러고 나면 너희는 더 이상 물질생활의 자원과 필요물을 함께 나누는 대가로 다른 존재에게 뭔가를 달라고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불충분함, “넉넉치 못함”에 대한 인간의식은 모든 불안과 모든 긴장, 모든 경쟁, 모든 질투, 모든 분노, 모든 갈등, 그리고 궁극에는 너희 행성에서 벌어지는 모든 살인의 뿌리 원인이다.
    여기에다 만물의 통일성보다는 분리성을 믿으려는 아집을 보탠 것, 이것이 너희 삶을 비참하게 만들고 너희 역사를 비극으로 만든 원인의 90%을 차지하고, 만인에게 더 나은 상황을 가져다주려 했던 너희 노력들이 무위(無爲)로 끝나고만 원인의 90%을 차지한다. 
    너희가 의식의 이 두 요소를 바꾼다면, 만사가 변할 것이다.

    어떻게요? 전 그렇게 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릅니다. 제게 도구를 주십시오. 그냥 진부한 의견이 아니라요.

    좋다. 당연히 그래야지. 자, 여기 도구가 있다.
    “인 듯이 행동하라.”
    너희가 모두 하나인 듯이 행동하라. 내일부터 그냥 그런 식으로 행동하기 시작하라. 그냥 모두를 힘들어하는 “자신”으로 보고, 공정한 기회를 원하는 “자신”으로 보라. 그냥 모두를 다른 체험을 하고 있는 “자신”으로 보라.
    그렇게 해봐라. 그냥 내일부터 주위를 둘러보고 그렇게 해봐라. 모두를 새로운 눈으로 봐라.
    그런 다음에는 “충분히 있는” 듯이 행동하기 시작하라. 네게 “충분한” 돈과 “충분한” 사랑과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너는 어떤 식으로 다르게 행동하겠느냐? 더 마음을 열고, 더 자유롭게, 더 균등하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겠느냐?

    인간 사회는 자기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을 “그르다”고 간주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고진재라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결론이다. 왜냐하면 어떤 공동체 속에 있든, 어떤 무리 속에 있든, 감정의 엄밀한 자각이야말로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앞에서 말했듯이, 고진재라면 절대 감정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사회 차원에서도 옳음”을 안다.
    사실 고진재로서는 어떤 경우에도 감정을 숨길 수 없다. 고진재는 다른 존재들에게서 그들의 감정이 뚜렷이 실려 있는 “진동”-사실상의 파장-을 읽는다. 너희가 방안에 들어 섰을 때 이따금 “공기를 느낄” 수 있듯이, 고진재는 다른 고진재가 무엇을 생각하고 체험하는지 느낄 수 있다.
    너희라면 “말”이라 불렀을 사실상의 소리내기는 있다 해도 아주 드물게만 사용된다. 고도로 진화된 모든 지각 있는 존재들 사이에서는 이런 식의 “텔레파시 교류”가 이루어진다. 사실 한 종이 진화 정도나 같은 종 안에서 구성원들간 관계의 진화 정도는 그 존재들이 감정이나 바램, 혹은 정보를 전달하는 데 “말”을 얼만큼이나 사용해야 하는가로 증명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네가 묻기 전에 대답하건대, 그렇다, 인간존재도 이런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고, 몇몇 사람들은 이미 발달시켰다. 사실 몇천 년 전에는 그것이 정상이었다. 그 이후 너희는 사실상 “소리”인 원초적 말하기를 이용해서 교류하는 수준으로 퇴보하고 말았다. 하지만 너희 중 많은 이들이 더 명확하고 더 정확하고 더 우아한 교류형태로 되돌아가고 있다. 이것은 특히나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러해서, 좋아하면 통하기Caring creates communication 마련이라는 주요 진리를 역설해준다.
    사실 사랑이 깊다면 말은 불필요하다. 그리고 이 공리의 역도 참이어서, 너희가 서로에게 더 많은 말을 써야 할수록, 서로를 아껴주는 데 들이는 시간은 아마 틀림없이 더 적을 것이다. 좋아하면 통하기 마련이기에.
    궁극의 차원에서 모든 참된 교류는 진실에 관한 것이고, 참된 진실은 오직 사랑뿐이다. 이 때문에 사랑이 있는 곳에는 통함이 있는 것이다. 서로 잘 통하지 않는 건 사랑이 충분히 존재하지 않다는 표시다.

    오직 동기motive만이전부고, 목표가 결과를 결정한다. 삶은 너희의 의도에서 비롯되고, 너희의 참된 의도는 행동으로 드러나며, 너희의 행동을 결정하는 건 너희의 참된 의도다. 삶의 모든 것이(그리고 삶 자체가) 그러하듯, 이것도 순환이다.

    너희가 하늘과 땅에서 보는 모든 것이 창조되고 있는 나다. 창조과정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절대 완결되지 않는다. 나는 결코 “되어지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천지만물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어떤 것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는 에너지energy, in motion다. 지상의 속기로 너희가 “감정”E-motion이라 부르는 게 이것이다!
    너희는 신의 가장 고귀한 감정이다!
    너희가 뭔가를 바라볼 때, 너희는 시공간 속의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뭔가”를 보고 있는 게 아니다. 천만에! 너희는 사건을 목격하고 있다. 모든 게, 그야말로 그 모든 게 움직이고 변하고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동사인 것 같다”고 말한 사람은 버크민스터 풀러였다. 그는 옳았다.
    신은 사건이다. 너희는 그 사건을 삶이라 불러왔다. 삶은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관찰할 수 있고, 알 수 있고, 예견할 수 있다. 더 많이 관찰할수록, 너희는 더 많이 알고, 그 만큼 더 많이 예견할 수 있다.

    삶이 가져다주는 것들을 좋아해라!
    그것들을 네게 가져다주는 이가 너 자신임을 알고 이해해라.
    완벽을 보라.
    너희가 완벽이라 부르는 것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것에서 완벽을 보라. 

    “거기에 이르는” 길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냥 자신이 이르고자 하는 곳에 있어라! 그건 이토록 간단하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행복해지길 바라느냐? 행복하라. 현명해지기 바라느냐? 현명하라. 사랑이길 바라느냐? 사랑이어라.
    어쨌든 바로 이런 게 ‘너희’다.
    너희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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