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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원한 진리를 찾아서
    나의 서재 2024. 1. 21. 10:57

     

    <히말라야를 넘다> 

    이 책의 목적은 다만 갇혀 잠들어 있던 내적 존재를 풀어주고 깨우려는 것이다. 참자아의 권능과 가능성을 자각하게 되고, 당신이 제한된 삶에 갇힌 왜소한 인격체가 아니라 온 우주 활동의 중심이며 우주의 힘들과 직접 연결되어 있음을 일깨우려는 것이다. 이것이 당신이 더 이상 운명의 바람에 나부끼는 낙엽이 아니라 자연의 지배자로 각성해 조악한 신체가 규정하는 왜소함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저자(MacDonald-Bayne)의 다른 책들 : <The Higher Power You Can Use>, <I am the Life>, <Heal Yourself>, <Spiritual and Mental Healing>, <What is Mine is Thine>, <How to Relax and Revitalise Yourself>, <Divine Healing of Mind and Body: the Master speaks again>

    당신이 뭔가를 믿거나 믿지 않거나, 뭔가를 수용하거나 거절하거나, 그로 인해 자신의 초라한 관념과 종교적 신념이 뒤흔들리거나 어떤 식으로든 마음에 동요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당신은 자유롭지 않다는 뜻이다. 자동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은 자유롭지 않고 감금되어 있다는 뜻이다. 단죄하고 비난하고 회피하고 무턱대고 받아들이거나 부작정 맞설 때 마음이 아둔해진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마음이 대립과 관념과 선입견 같은 것에 사로잡히지 않을 때라야 가슴은 사랑으로 생동할 수 있다.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대생명의 호흡에 맞춰 '옴' 소리를 낸다면 몸의 모든 세포가 조화롭게 되고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 
    전파를 송수신하는 기관은 사람에게 있다. 뇌하수체가 송신기관이고 솔방울샘이 수신기관이다. 누군가 생각을 보내면 그 생각에 주파수를 맞추고 있는 사람이 받게 된다. 이 과정은 애쓴다는 생각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메시지를 받는 자는 의식적인 해석을 하려고 애를 쓰면 안 되고 그냥 느낌이 마음에 들어오게끔 내버려두어야 한다. 그러면 느낌은 생각으로 바귀고 이제 자신이 받아들인 내용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입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아도 서로 이야기할 수 있다. 둘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면 가능하다. 가끔 시도해보라. 서로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고 더욱 깊어진 사랑을 느낄 수 있어서 크게 놀랄 것이다. '곁에 없을 때 더욱 애틋해진다'는 말은 과연 참이다. 이때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고 있기 때문에 이 일이 가능한 것이다. 

    뭔가가 되기 위해 애쓴다면, 항상 투쟁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 존재한다는 것을 그저 알 때, 투쟁은 그친다. 그때라야 자유로운 생명이 자각될 수 있다. 자신의 참된 현존에 대한 이해가 어느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부족하기에 그동안 사고와 활동에 제약이 있었던 것이다. 

    질병은 대부분 특정 원인들의 결과이자 자연스러운 법칙을 무시한 결과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질병은 무지와 두려움으로 인해서 사랑이 결핍되어서 항상 사랑을 추구하고 있는 자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일어난다. 아픔은 몸과 마음이 자연스러운 리듬을 잃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상이다. 그리고 이를 회복하기 위한 '투쟁'이 바로 질병이다. 하지만 자기 존재의 진리를 깨닫고 나면 참된 치유가 일어난다. 마음이 진리로 가득 채워지면 때때로 완전하고도 즉각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신유다. 
    만약 질병이 실체가 있는 것이었다면 질병을 치유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실재는 변화에 종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떠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암시에 힘입어 자아는 두려움 속에 태어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류에게 있어서 대부분 고통의 원인이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을 제거하는 것이 최우선과제다. 살아있는 우주 안에는 죽어 있는 입자가 하나도 없다. 생명에는 죽은 부분이 있을 수 없다. 생명과 죽음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 둘은 하나이고 같은 것이다. 죽음이란 영원한 생명 안에서 한 국면에서 다른 국면으로 넘어가는 것일 뿐이다. 

    마음이 자신의 공식과 믿음과 관념에서 자유로워질 때 시간을 초월한 침묵이 들어선다. 이 침묵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생생히 의식하게 된다. 이 자유 안에서 창조적 에너지가 풀려나고 평범한 사람들은 모르는 권능이 의식을 갖고 상황을 주관한다. 
    나는 우주를 다스리는 지성이 있음을 알았다. 바로 그 지성이 우리도 다스리고 있으며, 그 자체로 완전하기에 사소한 것조차 놓치는 일이 없음을 알았다. 

    믿음이란 마음의 과정이고 이미 알고 있는 것에서 태어난다. 만약 '신은 미지의 그것이다'라고 말만 한다면 미지의 그것에 대해 관념을 창조할 뿐이다. 하지만 미지의 그것에 관한 정신적 창조물은 미지의 그것, 창조적인 그것, 실재인 그것 자체는 아니다. 
    타인에게 베푸는 우리의 사랑과 애정이 진정한 기도이고, 말뿐인 기도는 거짓 기도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의 요가>

    모든 욕망과 추구는 자아의 확장일 뿐이고, 자아는 실재가 아니다. 그리스도 요가는 실재, 즉 그리스도를 숨기고 있는 모든 것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자아'라는 것, 즉 '나'라는 것은 생각의 형태로 자신을 투사하는 기억의 다발에 불과하다. 생각과 자아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 둘은 하나다. 생각과 자아는 진리가 될 수 없고 진리를 드러낼 수도 없다. 우리는 마음을, 기억을, 시간을 넘어서 있는 것에 이르러야 한다. 하지만 기억이 작동하는 한, 시간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시간은 실재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심코 듣는다.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는다. 자기 조건과 믿음과 견해를 파헤치거나 방해하는 것들에는 마음과 귀를 닫하버린다. 자신이 처한 조건을 충족하는 감언이설에만 귀 기울인다. 
    진리를 드러내려면 마음은 반드시 고요해져야 한다. 그러면 시간에 속하지 않은 고요가 들어선다. 이 고요는 억지로 만들거나 강요된 고요가 아니라 마음이 수다를 멈출 때, 그 침묵속에 실재가 존재하고 미지의 것이 들어서게 됨을 이해할 때 찾아오는 고요이다.
    나는 사람들의 모든 문제가 기억과 경험과 시간의 결과임을 이해했다. 기억은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문제는 문제가 발생한 수준에서 해결될 수 없다. 반면 기억이 멈출 때 문제는 '지금 당장' 해결된다. 초시간적인 것 안에는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오직 시간 안에서만 존재하고, 시간은 문제가 존재하는 마음을 제외하고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신만 존재하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의 모든 문제는 신의 사랑과 지혜 안에서 사라져버린다. 그러므로 지금이 유일한 시간이다. 어제와 내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의 구름이 현재를 가리고 있는 동안은 '지금'이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정한 명상은 집중의 수단이 아니다. 집중은 배제와 제한과 수축을 뜻하기 때문이다. 명상은 자유다. 시간으로부터의 자유말이다. 
    진리는 결론이나 관념이나 그 어떤 정신적 고안물도 될 수 없다. 이것들은 자신이 지어낸 것이기 대문이다. 그러나 진리는 지어내지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지금 존재하고, 시간에 종속된 것이 아니며, 시간은 진리를 드러낼 수 없다. 

    각각의 생각이 일어날 때, 편견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부인하거나 단죄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그 의미를 밝히면서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들은 다시 떠오르 않을 것이다. 이미 끝나버렸으니 말이다.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이 바로 명상의 시작이다. 다른 기법이나 자세나 호흡법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압박하거나 단죄하거나 정당화하지 않고 순간순간 부단히 알아차려야 한다. 현상을 그저 있는 그대로 보는 수동적인 경계심을 품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 혼돈에 빠진 사람의 마음만이 문제가 있을 뿐, 혼돈이 그치면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명상을 하는 데는 '아무 '방법도, '아무' 체계도 필요없다. 그런 것은 정형화된 양식을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리는 그런 양식이 아니다. 자유를 결과로 누리려면 시작부터 자유를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 

    자아가 자기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자아는 바깥에 있는 신에게 기도한다. 이것이 바로 신을 믿는 자들이 신을, 미지의 것을 절대 알 수 없는 이유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바깥에 있는 신을 믿기 때문에 절대 신을 알 수 없다. 하지만 무신론도 믿음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 역시 미지의 것을 발견하는 데 방해가 된다. 믿음과 불신은 둘 다 조건에 따른 반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기지의 것의 결과이자 기지의 것의 일부이다. 기지의 것은 곧 기억이고, 기억은 결코 미지의 것을 깨달을 수 없다. 

    고요한 마음은 생명의 의미 전체를 깨닫는 데 필수적이다. 그런데 무엇인가 되고 싶은 바람, 어떤 결과를 얻고 싶은 욕망이 있다면 모순이 생길 수밖에 없고, 모순이 있는 곳에는 고요한 마음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시간의 결과인 생각은 영원한 것을 절대로 깨달을 수 없고, 시간을 넘어서 있는 것을 절대로 알 수 없다. 생각의 본성 자체가 과거와 미래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살아 있는 현재를 충분히 자각할 수 없고, 또 그로 인해 지금 안에 담긴 사실을 완전히 알아차리지 못한다. 시간의 산물인 생각은 자신의 대립 쌍을, 자신의 모순을, 자신이 직접 창조하고 있는 모든 문제를 제거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생각은 그저 목적을 따를 뿐이다. 

    사람들은 현재에 살지 않기 때문에 희망이 더욱 중요해진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희망은 항상 미래의 어느 시점에 있다. 그러나 미래는 오직 마음속에만 존재한다. 사람은 결코 과거도 미래도 아닌 항상 현재에만 살아 있다. 지금은 바로 이 순간 창조적이고, 순간순간 늘 새롭다. 그 안에서 기억은 사라지고 사랑이 유일한 실재가 된다. 
    사람들은 젊을 때는 미래에 목을 매고, 늙어서는 과거에 젖어 산다. 그 이유는 단지 사람들이 지금을 현재를 살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미래를 현재보다 중요한 것으로 만들 때 우리는 현재를 살아갈 수 없다. 이것을 분명히 이해할 때 자신과 상대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들어서는 것이다. 자신, 즉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이해하는 데 기억은 필요하지 않다. 기억은 자신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다. 기억의 실체를 이해할 때라야 기억은 그 중요성이 사라진다. 기억은 삶을 지루하고 공허하게 만든다. 기억으로 인해 갈등 속에서 살게 되기 때문이다. 다만 심리적 기억은 방해가 되지만 사실에 대한 기억은 일상생활에 꼭 필요하다. 이런 기억마저 없다면 서로소통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다면, 뜻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소유욕이 있는 곳에 질투와 두려움이 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 아닌 것을 찾아내고 나면 우리는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분명 사랑은 소유, 질투, 두려움을 뜻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유하려할 때는 두려움과 질투가 들어선다. 우리는 사랑을 소유할 수 없다. 사랑이 당신을 소유해야 한다. 사랑이 당신을 소유할 때 당신은 더 이상 두렵지 않고, 질투하거나 소유하려 들지도 않을 것이다.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자신을 과시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자아가 사라진 자리에 들어서는 것이 사랑이다. 
    어떤 문제가 마음의 산물임을 이해했다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음이 기존의 낡은 배경지식으로 새로운 방법을 쥐어 짜내기를 멈추게 해야 한다. 그런 후에야 사랑이 들어선다. 그러기 전에는 불가하다. 사랑이 함께하면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무엇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남아 있는 한, 그런 상황에서는 '자아', '나', '내 소유'라는 관념이 강화될 수밖에 없고 그 결과로 자신의 제약, 기억, 곧 자아가 더욱 강화된다. 되고자 하는 갈망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때라야 이 모든 의식의 껍질을 벗겨낼 수 있다. 
    만약 고정된 관념과 신념이 마음을 좌우한다면, 무엇이 거짓인지 모르기에 그 무엇에 대한 진실도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이해를 얻어 유연하고 자유롭다면, 거짓을 간파할 것이기에 참된 의미를 경험할 것이다. 거짓은 지어낼 수 있지만 참은 지어내지 못한다. 참은 항상 현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신이 다른 이들과 맺고 있는 관계,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를 알게 될 것이다. 

    자유를 경험하고자 한다면, 상대가 제아무리 박식하다 하더라도,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권위에도, 의존해서는 안 된다. 의존은 형태와 상관없이 불확실함과 두려움을 일으키기 마련이고 그 결과로 실재를 경험하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생각들이 올라올 때마다 하나하나 직시하면서 그 뜻을 드러내야만 그것들은 마무리가 되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된다. 마무리가 되지 못한 생각들과 이해되지 못한 생각들만 계속 올라오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마음이 자신이 욕망하고 축적한 것과 자신이 처한 환경의 틀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고, 편협하고 제한되고 통제받는다면, 마음은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신이 곧 자신의 생각들임'을 보고 나면, 이해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생각들을 창조한 것임을 알아본다면, 그것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것을 이해할 때 비로소 자유가 들어서게 된다. 이 자유 안에 실재가 있다. 그때 우리는 생각하는 자와 그의 생각 사이에 아무 갈등도 없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고, 우리 마음은 더 이상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명상을 위해 따로 배울 기술이나 기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도리어 자유와 자기 인식이라는 제1원칙에서 멀어진다. 자기 인식이 없다면 자유 또한 없다.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보다 종교 서적을 읽거나 신에 대해 사색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나 자아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자아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실재를 깨닫기란 불가능하다. 평화는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욕구가 하나도 없을 때 존재한다. 되어감이 도리어 실재에서 멀어지는 것임을 이해할 때, 무엇이 되기를멈추게 된다. 되기를 멈추면 실재가, 창조성이 들어선다. 그러면 안전을 구하지 않게 된다. 안전을 구하는 마음은 늘 두려움에 떨고 있고, 창조적 존재로서 누리는 기쁨을 결코 알지 못한다. 이를 위해서는 마음과 가슴이 평화롭고 고요해야 한다. 그러면 갈등이 없는 상태가 어떠한지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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