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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마크리슈나가 남긴 말
    나의 서재 2024. 11. 10.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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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마크리슈나가 남긴 말

    Q: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떤 마음가짐으로 생활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A: 무엇이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게. 그러나 마음은 언제나 신쪽으로 향해 있어야 한다네. 그러나 누구 한 사람도 자기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명심하도록 해야 한다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여러 가지 일을 하더라도 그 마음만은 언제나 신에게 향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그 마음이 신을 향하지 않은 채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점점 마음은 더욱 때가 묻게 된다. 그리하여 이 때묻은 마음은 재난이나 슬픔, 고통 따위를 부르게 된다. 그리고 이 세상일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에 대한 집착만 더해진다.

    생각해보라. 도대체 돈으로 무엇을 손에 넣겠다는 것인가. 우리는 돈을 통해서 음식과 옷, 집 등을 마련할 수 있다. 그러나 돈으로는 결코 신과 진리는 손에 넣을 수 없다. 그러므로 돈이 인생의 목적은 될 수 없다.

    Q: 신을 깨닫는 일이 과연 가능합니까?
    A: 가능하고말고. 신을 깨닫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꾸준히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 시간이 나는대로 조용한 곳에 앉아 명상을 할 것.
    둘째, 언제나 늘 신의 이름을 부를 것.
    셋째, 진실과 진실이 아닌 것을 철저히 가려낼 수 있는 식별력을 단련시킬 것.

    Q: 어떠헥 하면 신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A: 무아지경이 되어 울면 가능하지. 아내와 자식을 위해서라면 사람들은 항아리 가득 눈물을 흘린다. 돈을 위해서라면 눈물로 연못을 가득 채울 수도 있다. 하지만 신을 그리워하며 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마음을 다하여 불러라.
    진정한 마음으로 불러라.
    너의 부르는 소리 들으면
    어머니(신)는 오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

    신은 모든 곳에 있다 그러나 역시 선량한 사람과는 가까이 사귀고 나쁜 사람과는 거리를 두지 않으면 안 된다. 호랑이 속에도 신은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호랑이를 안고 살 수는 없다. 호랑이 속에 신이 있는데 사람들은 왜 도망가는가. 여기 그 답이 있다.
    '호랑이다, 도망쳐라.'라고 외치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도 신이 있다. 그러므로 "도망쳐라"는 이 사람의 말을 우리는 신의 말로써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대강 다음의 네 갈래로 묶을 수 있다.
    첫째, 묶인 사람 : 세상일에 마음을 뺏겨 신을 잊어버린 사람.
    둘째, 해탈을 바라는 사람 : 이 세상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하는 사람.
    셋째, 해탈한 사람 : 이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난 성자나 명상가.
    넷째, 영원한 사람 : 깨달음을 얻고 난 다음 사람들을 깨우쳐 주기 위하여 이 세상에 머무는 사람.

    Q: 수행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A: 방법은 오직 한 가지가 있다. 열심히 할 것, 그분(신)을 좋아할 것,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기도할 것, 이것뿐이다.
    Q: 좋아하는 것과 기도, 이 둘 가운데 어느 쪽이 우선입니까?
    Q: 신을 좋아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 다음이 기도다.

    여자들 가운데는 지혜있는 여인도 있고, 또 무지한 여인도 있다. 지혜있는 여인은 남자를 진리의 길로 안내한다. 그러나 무지한 여인은 남자로 하여금 신을 잊게 하고 더욱더 세속으로 빠지게 한다.

    Q: 무지 때문에 우리는 신을 잊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신은 왜 무지를 존재하게 했습니까?
    A: 이 모든 것은 그분의 스포츠(유희) 현상이다. 어둠이 없으면 빛을 느낄 수가 없다. 불행이 없으면 행복을 알 수가 없다. 악을 앎으로써 우리는 선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지혜와 무지, 이 두 개는 우리에게 필요하다.

    Q: 인간은 누구나 색정이나 분노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감정들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A: 그런 감정이 솟거든 그 감정들을 신쪽으로 돌리게. 욕망이 일거든 그 욕망을 아트만(본래자기)와 섞이고 싶다는 욕망으로 바꾸게. 그리고 분노의 감정이 솟거든 그 분노의 감정을 신의 길을 방해하는 것에 대한 노여움으로 바꾸게.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는 대신 신을 손에 넣고자 큰 욕심을 부리게.

    저 바람속의 낙엽과 같은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라.
    바람은 낙엽을
    집안으로 실어가기도 하고
    또 쓰레기더미 위로 날라다 놓기도 한다.
    그러나 낙엽은 바람 부는 대로
    어디든 개의치 않고 날아간다.
    좋은 곳이든 나쁜 곳이든 관계없이.

    신께서는 지금 그대를
    <이 세상>이라는 곳에 날라다 놓았다.

    보라.
    이 세상도 괜찮지 않은가.
    지금은 이곳에서 그냥 살아가라.

    신이 다시 이곳보다 더 좋은 곳으로
    그대를 실어다 준다면
    그때는 또 그때 그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나는 생명의 바다에 살고 있네.
    파도 사이에 뜨고 잠기며
    밀물과 썰물에 오고감이여.

    그분께서 그대를 여기 이 세상에 놓다두신 것이다. 어쩔 수 없지. 그러므로 이 모든 걸 그분께 맡겨 버려라. 그분께 그대 전부를 맡겨 버려라. 이렇게 하면 더 이상 걱정도 없고 근심도 없어진다. 이제 알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아니라 그분께서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는 것을.

    이 세상에서 사는 일도
    출가의 수도생활을 하는 일도
    이 모두가 신의 뜻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그분에게 맡겨버리고
    주어진 일이나 열심히 하도록 하라.

    올챙이는 꼬리가 떨어지기 전에는 물속에서만 산다. 그러나 꼬리가 떨어지면 곧 땅으로 뛰어오른다. 꼬리가 떨어져 개구리가 되면 물속에서도 살 수 있고 또 육지에 올라와서도 살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무지의 꼬리가 떨어지기 전에는, 이 세상의 물에 빠져서 그곳에서밖에 살지 못한다. 그러나 무지의 꼬리가 떨어지게 되면, 즉 지혜가 열리게 되면 자유롭게 땅위를 걸어 다닐 수도 있고, 또 필요에 따라서는 이 세상의 물에 들어가 살 수도 있다.

    아들이 없던 한 농부가 어느날 아들을 얻었다. 하루는 들에 나가 밭일을 하고 있는 그에게 아들이 콜레라에 걸렸다는 연락이 왔다. 농부는 곧 집으로 돌아와서 백방으로 손을 써봤으나 아들은 결국 죽고 말았다. 그러나 가족들은 모두 슬피 울었지만 농부만은 아무렇지도 않은듯 담담하게 앉아 있었다. 그는 오히려 우는 식구들을 슬퍼하지 말라고 달랬다.
    그런 그를 보고 아내는 원망을 했다.
    "당신은 참 비정한 사람이군요. 외아들이 죽었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다니..."
    농부는 말했다.
    "나는 어젯밤에 참으로 이상한 꿈을 꾸었소. 나는 임금이 되어 여덟 왕자를 거느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소. 그런데 아침이 되어 그만 그 행복한 잠에서 깨어나 버리고 말았소. 그래서 나는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중이오. 꿈속에서 없어진 나의 여덟 왕자를 위하여 슬퍼할 것인가, 아니면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위하여 슬퍼할 것인가."
    이 농부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다. 꿈의 상태가 일종의 착각인 것과 마찬가지로 깨어있는 상태 역시 일종의 착각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 현상계란 저 영원불변의 실재(신)가 변화하면 활동하는 그 활동현상이다.
    그러므로 나는 저 영원불변의 실재(신)도 이 활동현상도 모두 받아들인다.
    이 세상이 환영이라 해서 나는 결코 이 세상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환영의 이 세상을 거부하게 되면 이 삶의 무게가 줄어버리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하여 신에게 기도하라. 그러면 그분은 그대의 바램을 들어주신다. 그분은 틀림없이 그대가 출입하기에 알맞은 구도자의 모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실 것이다. 이것은 그대의 영적인 진전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어쩌면 어느 사람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하면 신을 깨달을 수 있다."고 말을 해줄지도 모른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전부다.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자선을 행하게 되면 그것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좋은 일이다. 그런 자선 행위는 바로 그분(신)께 드리는 봉사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는 지금 이 자선 행위를 통하여 온갖 만물에 존재하는 그분께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께 봉사한다는 것은 즉 자기 자신을 위한 최상의 봉사행위다. 그러므로 자선이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행위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인생의 목적은 일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말이다. 인생의 목적은 일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깨닫는 것>이다. 일은 어디까지나 인생이라는 책의 두 번째 장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것(일)이 결코 인생아리는 책의 목표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집착심이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수단일 뿐 목적이 될 수 없다.

    이 세상일에 묶인 사람들,
    그들은 마치 누에고치와 같다.
    그럴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밖으로 나올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애써 만든 자신의 집을 누에는 뚫고 나오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누에고치는 그 속에서 생을 마치고 만다.

    Q: 전능한 신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나쁜 사람들이 왜 이리 많습니까?
    A: 이 세상에 나쁜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연극의 진행상 그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의 화신이 이 세상에 나타나서 활동을 할 때는, 신의 일을 방해하는 훼방꾼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사사건건 일을 그르치게 하는 악역이 필요한 것이다. 이 훼방꾼이 없으면 신의 활동무대가 극적이기 못하게 된다. 만일 이 악역이 없다면 연근의 진행은 재미없어질 것이다. 연극의 재미를 위해서는 나쁜 사람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나쁜 사람의 배역을 맡은 사람들이 늘 존재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동시에 신을 깨닫는다는 것은 불가능한가.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얼마든지 신을 깨달을 수 있다.
    "이 세상은 환영의 장막이다."라고 벵갈의 신인 람브라시드는 말했다. 그러나 신을 향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면 이 환영의 장막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신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만찍하기 위하여 신 스스로가 신봉자와 신 둘로 나뉘어져 존재하고 있다. 예배보다는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이 낫고 그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는 그분을 명상하는 쪽이 낫다. 또한 명상보다는 그분에게 친근감을 갖는 쪽이 낫다. 그러나 무엇이든 다 바쳐 그분을 사랑하는 쪽이 가장 낫다.

    신봉자들도 결국은 명상의 절정인 <둘이 아닌> 평등불이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들은 신을 제하고는 이 세상에는 그 어느 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신봉자들은 이 세상을 꿈이나 환영으로만은 보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단순한 꿈이나 환영이 아니라 그 꿈이나 환영의 상태를 통하여 신이 나타난 것이라 보고 있다. 그러므로 삶에 대한 신봉자들의 태도는 긍정적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무지하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신을 찾는 마음이 전혀 없다. 그리고 갖가지 사물이 실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지혜를 얻으면 이 모든 사물 속에 신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의 집, 내 돈, 나의 학식 -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무지다.
    "어머니(신)여, 당신은 나의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것은 모두 어머니, 당신의 것입니다. 아내도 아이들도 친구도 이 모두가 당신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지혜에서 비롯된다.

    <나>라는 것을 지워버리게 되면 괴로움도 고통도 지워져 버린다. 그러나 이 <나>라는 느낌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다.
    이럴 경우에는 '나는 신의 신봉자다. 나는 신에게 모든 걸 바쳤다.'라고 자랑스러운 기분으로 남아 있는 것이 좋다. '신은 도구를 쓰시는 분, 나는 도구'라는 이 이치를 깨닫지 않으면 몇번이고 이 세아에 되돌아도게 된다. 즉 인간으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러나 '그분만이 행위자'라는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이제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 이 나와 나의 것이 절대불변의 진실을 가리고 있다.
    '신께서 모든 것을 해주신다. 쓰시는 분은 그분이요, 나는 그분의 도구에 불과하다.' 이러한 신념이 확고해지면 그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해탈을 성취한다.

    신만이 진실이요, 영원한 실재다. 어떤 방법을 써도 좋으니 그분을 믿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내 것으로 만들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덧없는 것들에게, 이제 곧 사라져버릴 물거품들에게 언제까지나 집착해가며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붙잡지 마라. 붙잡지 마라. 이 바퀴를.
    마차를 가게 하는 건 이 바퀴지만 그러나 바퀴를 움직이는 것은 신이다
    신의 바퀴로 이 세계는 움직이고 있다.
    마차꾼을 탓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 마차꾼에게는 아무 힘도 없다.
    그분의 지시에 따라 마차는 어디든 가고 있으니...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은 신을 깨닫거나 진리의 길을 가기가 어렵다.
    첫째, 음흉하고 교활한 사람, 솔직하지 못한 사람.
    둘째, 지나치게 결백하고 병적으로 깨끗한 것만을 좋아하는 사람.
    셋째, 의심이 많은 사람.

    정말로 신을 깨달았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그 징표가 여기 있다.
    첫째, 명랑하고 항상 즐거워 보인다. 무슨 일이든지 겁을 내거나 물러서는 일이 없다.
    둘째, 큰 바다와 같은 느낌을 준다. 겉보기에는 파도가 치며 소리를 내고 있지만 그 내면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이다.
    셋째, 어떤 사람은 신을 깨달은 다음 실성한 사람처럼 되기도 한다. 신을 깨닫게 되면 깨끗함과 더러움의 차이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넷째, 지각이 없는 마치 바보와 같이 보일 수도 있다. 신을 깨닫고 나면 안과 밖이 오직 신만이 보이기 때문에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다섯째, 어린아이처럼 되는 수가 있다. 아무것도 마음에 두지 않은채, 때론 옷을 옆에 기고 발가벗고 어슬렁거리기도 한다.
    여섯째, 언제나 패기가 넘치며 도전적이다. 일을 하거나 남을 가르칠 때는 마치 사자와 같이 열정적이며 강인하다.
    신을 깨닫기 위해서는 강력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신의 길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즉시 버려야 한다. 머뭇거리지 말고 끊어야 할 것은 즉시 끊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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