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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대 자신을 아십시오(A Practical Guide to Know Yourself) by A. R. Natarajan)
    나의 서재 2024. 10. 19. 18:42

     

    그대 자신을 아십시오(A Practical Guide to Know Yourself) by A. R. Natarajan)
    Sri Ramana Marharshi(1879.12.30-1950.4.14)

    그대의 진정한 본성을 망각하는 것이 진정한 죽음입니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진정한 탄생입니다. 그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탄생을 끝냅니다. 그러면 그대의 삶은 영원한 삶입니다.
    참나 안에 머무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상태에 있지만, 마음은 그 대신에 바깥 대상들에 머뭅니다.

    Q: 제가 외부의 도움 업이 저 자신의 노력만으로 더 깊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A: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자기를 탐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신성한 은총의 나타남입니다. 내면의 존재, 진정한 참나인 영적 가슴 속에서 그것은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면에서 그대를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그대는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해야 합니다. 은총이 없이는 진정한 탐구가 없으며, 탐구가 없는 사람에게는 은총의 활동이 없다고 내가 말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둘 다 필요합니다.

    다람쥐들의 둥지는 바가반의 소파 위에 있었다. 새끼 다람쥐들의 어미를 고양이가 잡아먹어 버려서 바가반이 어린 다람쥐들을 돌보게 되었다. 바가반이 말했다.
    이 어린 것들은 자기 둥지에 머물러 지내는 것이 지혜로움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밖으로 나오려고 애씁니다. 모든 문제는 밖에 있는데도 그들은 안에 머무르지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영적 가슴 안에 잠겨 있으면 오로지 행복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자꾸 밖으로 나가려 합니다.

    Q: 자기 탐구의 개념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조용한 장소에 앉아서 "나는 누구이가?"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묻는 것입니까? 아니면 만트라에 대해 명상하듯이 그 질문에 대해 명상하는 것입니까?
    A: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하고 반복하는 것도 아니고 이 질문에 대해 명상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 속으로 깊이 들어가 그대 안에서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찾는 것이며, 다른 생각들을 배제하고 그 생각만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꾸준하고 끈질기게 노력하면 결국 참나에 이를 것입니다.

    Q: 우리가 세상에서 사람들의 고통을 볼 때, 마음은 몹시 흔들립니다. 저는 미력이나마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습니다.
    A: 그대는 어떤 종류의 도움을 주고 싶습니까? 그대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남들을 도우려 합니까? 남들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먼저 그대의 집을 정돈하십시오. 세상은 그대없이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남들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그대가 진정으로 누구인지 알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대는 지금 제 앞에 앉아 있는 인간의 몸일 뿐입니까? 남들을 돕기 전에 먼저 이것을 아십시오. 그대가 누구인지 알아보시시오. 만약 그대가 자기 자신을 안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입니다.

    Q: 참나 깨달음은 쉽지 않습니까?
    A: 그래요, 쉽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보이지만 어려움도 있습니다. 그대는 현재의 잘못된 가치 기준과 그릇된 동일시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탐구에는 집중적인 노력이 필요하며, 근원에 이르러서는 그 안에 꾸준히 머물러야 합니다.
    그렇지만 단념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를 찾겠다는 갈망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바로 신의 은총 덕분입니다. 일단 이 갈망이 그대를 붙잡으면, 그대는 은총의 손아귀에 붙잡힌 것입니다. 호랑이의 입 속에 들어간 먹이가 결코 빠져나올 수 없듯이, 신의 은총의 움켜쥐는 힘은 결코 느슨해지지 않으며 마침내 그대를 삼켜 버립니다.

    구도자는 참나 지식을 얻는 데 적절치 않은 문제들로 산란해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목표를 잊지 말아야 한다. 더 많은 경전 지식을 얻으려는 욕망과 세상에 대한 염려, 그리고 열반에 들 때 그 몸에 일어날 일에 대한, 다른 사람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다른 사라을 돕는 것 등에 대한 관심들은 구도자로 하여금 자기 탐구의 한결같은 추구에서 벗어나 길을 잃고 헤매게 한다. 우리는 인생의 목적을 되풀이해서 상기해야 한다. 그 목적은 본연의 자연스러운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다.

    그대는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불완전하다는 생각이나 발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자아는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을 하는 것은 마음이며, 마음은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모습을 알면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대와 분리된 세상이 따로 존재합니까? 세상이 스스로 자신이 존재한다고 말합니까? 먼저 '나'의 진실을 찾아보십시오. 무지한 사람들은 늘 자기 앞에 있는 세상을 보고서 그것이 실제한다고 믿습니다. 세상은 거울 속에 비친 모습과 같을 뿐입니다. 만약 세상이 비실재로서 휙 사라져 버리면 망상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드넓은 절대 의식 속으로 몰입됩니다. 여전히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굳이 말하자면, 세상은 분리된 실체로 보일 때의 세상으로서는 실제하지 않지만 참나의 현현으로서는 실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참나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실제인지 아닌지, 의식인지 물질인지, 행복한 곳인지 불행한 곳인지 궁금해 하는 이 모든 질문들은 무지에서 생겨납니다. 그것들은 깨달음 뒤에는 다 쓸모없게 됩니다. '나'라는 개인적 느낌이 없이 참나에 고정된 상태는 지고한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객관적인 사고나 개별적 존재라는 느낌이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존재 - 의식 - 희열이라는 자연스러운 상태에서는 어떠한 종류의 의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쁨을 느끼는 것은 누구인가? 신이다.
    기쁨은 무엇인가? 본능적이든 아니든 신의 음미이다.
    이른바 '나'라는 것은 누구인가? 나는 신이다.
    신은 기쁨이다. 내가 영구적인 기쁨을 바란다면,
    나는 나 자신을 잊어야 하고 기쁨 그 자체인 그것,
    즉 신이어야 한다.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꿈이 실제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듯, 깨어있는 상태도 역시 우리가 이 상태에서 뚜리야의 상태로 깨어나면 실제하지 않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뚜리야'는 자아가 없는 상태로서, 마음이 영적 가슴 속으로 몰입되어 머물고 있는 상태이다. 깨어있는 상태가 부정되는 것은 오직 우리가 자기 탐구를 통해 마음의 틀 너머로 건너갈 때뿐이다. 우리는 각성수면이라는 상태, 즉 깨어있는 상태의 알아차림과 잠을 잘 때의 휴식이 결합되는 상태로 들어간다. 이러한 상태에 머무를 때, 우리는 실제하는 것으로 보였던 깨어 있을 때의 상태도 역시 실제하지 않는 상태임을 인식한다.

    어디에나 있는 창조주는 사람들로 하여금 카르마에 따라 삶에서 맡은 역할을 하도록 합니다. 정해지지 않은 일은 아무리 애를 써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정해진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길은 침묵하는 것입니다.

    운명은 자유 의지 없이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자유 의지가 그 근원입니다. 그것은 그 결과를 초래하고 운명을 만듭니다. 선한 생각과 행위들은 좋은 결과들을 가져옵니다. 마찬가지로 바람직하지 않은 생각과 행위들은 좋지 않은 결과들을 초래합니다. 해로운 반응들을 피하려면 먼저 마음이 순수해져야 합니다. 자유 의지는 지혜롭게 발휘되어야 합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운명이 작용하고 있을 때는 마음도 순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은 운명과 같은 길을 걷습니다. 선한 생각들은 바람직한 운명을 낳습니다. 자유 의지와 운명을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한된 범위 내에서는 운명이 자유 의지의 힘에 의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운명은 과거의 행위들의 결과입니다. 행위들은 이미 끝났고 완료되었습니다. 그것들을 지금 어떻게 없앨 수 있습니까?
    오직 영적 지혜와 식별만이 그 문제를 풀어 줄 것입니다. 자기 탐ㄴ구를 하면 진정한 '나'에 관한 문제가 풀립니다. 그러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깨달은 상태에서는 구도자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운명과 자유 의지는 효력이 없어져 공허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들을 초월하는 상태에 자리 잡습니다.

    Q: 인간의 삶에서 고향, 국적, 가족, 경력, 직업, 결혼, 죽음 등과 같은 두드러진 사건들이 모두 자신의 카르마 안에서 미리 결정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삶에서 일어나는 가장 사소한 세부 사항들까지 모두 미리 결정될 수 있습니까?
    A: 물론입니다. 몸이 하기로 되어 있는 모든 일, 몸이 겪기로 되어 있는 모든 경험은 몸이 생길 때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Q: 그렇다면 행위에 대한 인간의 자유와 책임은 어떻게 됩니까?
    A: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유는 자신을 몸과 동일시하지 않게 할 수 있는 지식을 얻으려 노력하여 그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몸은 카르마에 의해 불가피하게 부여된 행위들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을 몸과 동일시하여 그것의 행위들의 결실에 집착할 수도 있고, 아니면 몸에서 초연하여 그것의 행위들을 단지 목격하는 자로 남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Q: 무엇이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합니까?
    A: 욕망입니다. 그대의 채워지지 않은 욕망이 그대를 다시 오게 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경우에, 각각의 몸에서 그대의 욕망이 충족되면, 그대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냅니다. 유일자 속으로 몰입되어 환생을 끝내려면 욕망을 정복해야만 합니다.

    Q: 원숭이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다르지 않습니까?
    A: 그들은 사람과 똑같습니다. 모든 창조물들은 '하나의 의식' 안에서는 똑같습니다.

    진정한 포기는 자신을 실제로 구속하고 있는 집착을 끊어 버린다는 것이다. 자신과 지혜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일과 아내, 자녀나 활동이 아니라 마음에 깊이 뿌리박힌 집착이다. 잘못은 자신의 소유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유자에게 있다. 비록 단란한 가정을 떠나고 모든 재산을 버린다고 해도, 집착은 여전히 깊이 뿌리박혀 있을 수 있다.
    숲 속에 있든 집에 있든 씨름해야 할 대상은 마음이다. 집착이 줄어들면, 그 사람은 익은 과일처럼 나무에서 떨어질 준비가 된다. 그때 가슴은 사랑으로 넓어진다. 이것은 '나'라는 생각과 그것의 근원에 대해 방심하지 않고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마음이 내면으로 향할 때만 일어날 수 있다.

    먼저 마음을 다스리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어디에 있건 행복할 것입니다. 그림자를 땅에 묻으려고 애쓰는 사람의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는 그림자를 묻기 위해 무덤을 파고 흙으로 덮었지만 그림자가 다시 나타나서 결코 묻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묻으려고 애쓰는 사람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생각들이 솟아나는 밑바닥에 도달하여 생각과 마음과 욕망을 뿌리 뽑으려고 시도해야 합니다.

    Q: 만약 가정을 버리고 홀로 사는 것이 필요없다면, 바가반께서는 어찌하여 열일곱 살에 이곳에 오셨습니까? 
    A: 만약 이것(자신을 의미한다)을 이곳으로 데려온 그 힘이 그대 또한 그대의 가정으로부터 데려와야 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자신의 노력으로 가정을 버리는 것은 쓸모가 없습니다. 그대가 해야 할 의무는 수행을 하는 것이며, 꾸준히 자기 탐구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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