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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나 마하르쉬 저작 전집(The Collected Works of Sri Ramana Maharshi)나의 서재 2024. 11. 20. 14:43반응형
<나는 누구인가?> Who Am I?
마음이 세속적 대상이나 다른 사람들이 관심 갖는 것들에 쏠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나쁘다 해도 그들에게 증오를 품어서는 안 됩니다. 욕망과 증오 둘 다 피해야 합니다. 우리가 남들에게 베푸는 것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만약 이 진리를 이해한다면 누가 남들에게 베풀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자아가 일어나면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자아가 가라앉으면 모든 것이 가라앉습니다. 우리가 겸허하게 행동하면 그만큼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Q: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A: 행복은 바로 진아의 성품입니다. 행복과 진아는 다르지 않습니다. 세계의 어떤 대상에도 행복은 없습니다. 우리는 무지로 인해 우리가 어떤 대상에서 행복을 얻는다고 상상합니다. 마음이 밖으로 나가면 불행을 경험합니다. 실은 마음의 욕망이 충족될 때도, 그것은 마음이 자기 자리(근원)로 돌아가서 진아인 행복을 즐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잠, 삼매, 기절의 상태에서나, 바라는 대상을 얻었거나 싫어하는 대상이 없어졌을 때, 마음은 안으로 향해져서 순수한 진아-행복(Self-happiness)을 즐깁니다. 이처럼 마음은 진아 밖으로 나갔다가 진아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면서 쉼 없이 움직입니다. 나무 밑의 그늘은 쾌적하고, 그 바깥은 열기가 뜨겁습니다. 햇볕 아래서 돌아다니던 사람이 그늘로 들어오면 시원함을 느낍니다. 그늘에서 햇볕 속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기를 계속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계속 그늘 속에 머무릅니다. 마찬가지로 진리를 아는 사람의 마음은 브라만(실재)을 떠나지 않습니다. 반면에, 무지한 사람의 마음은 세계 안을 맴돌면서 불행을 느끼다가, 잠시 브라만으로 돌아오면 행복을 경험합니다. 사실 세계라고 하는 것은 생각일 뿐입니다. 세계가 사라질 때, 즉 아무 생각이 없을 때는 마음이 행복을 경험하고, 세계가 나타날 때는 불행을 겪습니다.
Q: 무욕과 지혜의 관계는 어떤 것입니까?
A: 무욕이 지혜입니다. 그 둘은 다르지 않고 똑같습니다. 무욕이란 마음이 어떤 대상으로도 쏠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지혜란 (마음에) 어떤 대상도 나타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바꾸어 말해서, 진아 아닌 것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무집착 또는 무욕이며, 진아를 떠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자기탐구> Self-enquiry
생기(prana)의 제어인 요가와 마음의 제어인 지知(jnana) - 이것이 마음의 소멸을 위한 두 가지 주된 수단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전자가 쉽게 보일 수 있고, 어떤 이들에게는 후자가 쉽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知는 거친 황소를 푸른 풀로 유인하여 길들이는 것과 같고, 요가는 힘을 써서 황소를 제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현자들은 말하기를, 자질을 갖춘 세 등급의 구도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베단타적 탐구에 의해 실재의 성품을 판단하여 마음을 진아 안에 확고히 자리 잡게 함으로써, 그리고 자기 자신과 모든 사물을 실재의 성품을 가진 것으로 봄으로써 목표에 도달하고, 중간 정도인 사람들은 절대지식이나 실재에 대한 오랜 명상을 통해 마음을 심장 안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목표에 도달하며, 가장 낮은 등급의 사람들은 호흡제어 등을 통한 점진적인 방법으로 그런 상태를 얻는다고 합니다.
<영적인 가르침> Spritual Instruction
Q: 얼마나 오래 수행해야 합니까?
A: 마음이 개념들에서 벗어난 본래적 상태가 애씀 없이 저절로 이루어질 때까지, 즉 '나'와 '내 것'이라는 느낌이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수행해야 합니다.
<실재사십송>
여러 종류인 모든 상태들을 탐구하여,
거짓이 없는 지고의 상태인 그 하나를
확고히 마음으로 꽉 붙들고,
늘 세상 속에서 (그대의 역을) 연기하게, 영웅이여,
그대는 온갖 겉모습들의
실재로서 심장 속에 존재하는 그것(진아)을 알았으니,
그 소견을 버림이 없이 항상,
마치 욕망하듯이 세상 속에서 연기하게, 영웅이여.
<진아 5연시>
자신의 예전 자기를 잊어버린 채 몸만을 자기로 여기며
무수한 탄생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자기를 알고
자기가 되는 것은, 온 세상을 헤매고 다니던
꿈에서 깨어나는 것일 뿐이네.
<바가반 탄신일 경축에 대한 시>
생일을 경축하고 싶어하는 그대들이여, 먼저 누가
태어났는지를 탐구하시오. 우리의 진정한 생일은,
태어남도 죽음도 없이 영원히 빛나고 있는
그 영원한 존재 속으로 우리가 들어갈 때라오.
모든 날 중에서도 자기의 생일에는, (윤회계 속으로)
떨어진 것을 슬퍼해야 하리. 그것을
축일로 경축함은 시체를 장식하고 찬미함과 같으리.
자신의 진아를 추구하여 그 안에 합일함이 지혜로다.
<아홉편의 산시>
이 똥 만드는 몸뚱이를 자기(진아)로 오인하는 사람은,
돼지로 태어나 똥을 음식으로 여기는 이보다 더 못하다네.
진아에 대한 부단한 탐구를, 신에 대한 지고의 사랑이라 하네.
왜냐하면 그분이야말로 진아로서 모든 이의 심장 안에 안주하므로.
안으로 향한 마음이 평안이라 하는 것이, 밖으로는 힘으로 나타나네.
이 진리에 도달하여 이를 본 이들은 그것들이 하나임을 알고 있네.
자신의 운명에 만족하는 사람은 질투에서 벗어나 있나니,
복락과 불운에 흔들리지 않으며, 행위(업)에 구속되지 않는다네.
자신을 구제한 사람만이 남을 자유롭게 할 수 있나니,
(그러지 않고서) 남을 돕는다는 것은 장님이 장님을 인도함과 같네.
창조도 해체도 없고, 운명도 자유 의지도 없다네.
길도 없고 성취도 없으니, 이것이 궁극적인 진리라네.
<어머니에 대한 답변>
영혼들의 운명은 그들이 한 행위에 따라
모두 신이 정해 놓았다네.
결코 이루어지지 않도록 정해진 일은
아무리 애써도 결코 이룰 수 없고,
언젠가 일어나게 정해진 일들은
아무리 막으려 해도 일어난다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니, 결국 우리는
침묵하는 것이 최선임을 알게 되네.
<아가마 번역> Translations from the Agamas
마음이 조금만 움직여도 윤회계라오. 확고하게 움직임 없이 안주할 때 그것이 해탈이니, 이것은 확실하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지고의 의식으로 저 마음을 확고히 붙들어야 한다는 것을 아시오.
개아의 한 속박인 수많은 다양한 만트라나 생기를 단속하는 조식, 지식, 응념 등의 요가 행법을, 영구불멸의 해탈을 구하는 사람들은 닦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오.
늘 마음을 가지고 예공, 절하기, 염송, 명상 등을 닦을 여지가 전혀 없다오. 베다에서 선언한 최고의 진리는 지知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을 나에게서 들으시오. 그것이 자기 바깥에 있다고 알 필요는 전혀 없다오.
들뜸이 생겨 바깥의 대상에 마음이 끊임없이 달라붙는 사람들에게는 속박을 가중하는 요인들이 늘 일어날 것이오. 바깥으로 헤매는 마음이 안으로 향해져 그 본래적 상태에 머무른다면, 그는 세상에서 더 이상 슬픔을 겪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아시오.
청정무구하고, 안팎이 없고, 위, 아래, 중간 등의 방향이 전혀 없고, 창조계 안에서 일체의 형상을 취하지만 그 자체는 형상이 없으며, 그 자신에 의해서만 알려질 수 있고, 자기 스스로 빛나는, 그 하나인 완전한 전체와 합일하시오.
굳센 마음의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목표가 있어 그에 따라 행위하고, 그 목표를 이루면서 그 행위들의 결과를 거둔다오. 결함 있는 그런 행위들을 피하고 주의를 안으로 돌려 지각을 넘어서 있는 그것(진아)을 내관하시오.
형상이 없고, 하나인 의식, 허공의 형상으로 일체에 편재하는 저 큰 공을 명상하지 않는 사람은, 그래서 영원히 자신의 고치 속에 갇힌 누에처럼, 세간적 집착에 속박된 세속인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아시오.
알려지는 저 허공처럼 모든 창조계의 안팎에 편재하는 이 완전한 전체, 단 하나인 바탕은 형상이 없다오. 이 지고의 지복에 잠겨 있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여, 그 지복 자체가 된다오. 얼마나 경이로운지 보시오!
불길이 약해지고 연료가 떨어진 불이 제풀에 잦아들어 점차 꺼지듯이, 그것이 붙들 대상을 빼앗기면 많은 생각들로 뻗어나가는 마음도 (대상을) 붙들기를 그치고 평안 속에서 가라앉을 것이오.
속박하는 의지물을 찾아 감각 대상들에 집착하는 마음을 의지물들과 그에 대한 집착에서 떠나게 하시오. 의지하며 헤매는 마음을 고요히 움직이지 않게 하고, 그 고요함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게 하오.
평안을 얻고 나면, 5대 원소가 해체될 때도 그 원소들에 편재하는 허공이 오염되지 않고 순수하게 남아 있듯이 (창조계의) 모든 형상들에 두루 편재하면서 오염 없이 남아 있는, 저 비할 바 없는 진아에 대해 명상하시오.
그와 함께 그것이야말로 (사람으로) 태어난 목적의 달성이고 그것 자체가 (진정한) 학식의 표지인 것은, 바로 이 들떠서 움직이는 것이 바람과 같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들뜸이 없게 하는 수행을 닦는 것이라오.
(속박하는) 덫이 없고 의지물 없이 마음이 집착할 데가 없어 결함이 없고 순수하며, 욕망과 집착이 없는 상태가 '지知로써 얻는 해탈(jneya nukti)'의 표지라오. 이것을 확고히 마음에 새기시오.
자기에게 낯선 모든 집착의 대상을 포기하고 어떤 자취도 남기지 않는 그런 마음을 심장 안에 확고히 고정하면, 순수한 자각이 밝고 명료하게 빛날 것이오. 그 자각이 온전한 힘을 얻도록 꾸준히 수행해 나가시오.
'몸이 나다'라는 관념을 제거하고 자기의 몸이 없는 진정한 형상을 자신의 지知의 눈으로 보는 바로 그날, 그의 모든 욕망이 사라지고, 그는 평안의 지복을 체험한다오.
침묵으로 소득 없는 논쟁과 세속적인 사람들과의 교제를 피하고 남들 사이에서 헛된 다툼과 오해를 유발하지 말며, 경전에 해박한 종교 단체들에 가담하지 말고, 욕심과 칭찬의 말을 공히 포기해야 하오.
원숭이처럼 한시도 안정됨이 없이 늘 동요하는 마음이 어떠한 대상을 붙들고 밖으로 달아나든, 그것을 그 대상에서 거두어들이고, 그 마음을 늘 진아 안에 잘 고정하여 안정시켜라.
이렇게 하여 감각기관, 마음, 지성을 조복 받고 욕망, 두려움, 증오를 버린 뒤에, 오로지 해탈에만 몰두하여 그것을 열심히 추구하는 현자는 현자들 중 최고이며 (속박에서) 해탈해 있다.
영원히 모든 존재들 속에서 자기(진아)를 보고 모든 존재를 자기(진아) 속에서 보는, 옴염 없는 마음을 가졌고 요가로써 조화로워져 도처에서 평등한 눈을 가진 그런 요기는 실로 가장 복된 사람이다.
그처럼 진아에 자리잡아 다른 어떤 생각도 없이 나만을 늘 내관하고, 내 안에 늘 합일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그 헌신자들의 성취와 (성취한 것의) 보전을 내가 머리 위에 이고 책임진다.
결코 벗어남 없이 진아 안에서만 즐거워하는, 나아가 진아 안에서 만족하는 사람, 진아 안에서만 기쁨으로 행복해 하는 그런 사람에게는 늘, 실로 해야 할 어떤 일도 없다.
무엇이든 다가오는 대로 만족하며, 상대물의 쌍들을 넘어섰고, 시기심이 없고, 얻음의 행복과 얻지 못함의 불행에 똑같이 평온하고, 탁발을 한다 해도 그는 (행위자 관념이 없어) 결코 속박되지 않는다.
<분별정보>
행위는 마음의 정화를 위해 권장되는 것일 뿐, 실재를 깨닫기 위한 것은 아니다. 실재지知(vastu-jnana)는 탐구(vichara)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지 행위를 많이 한다고 해서 성취되지는 않는다. 브라만의 지는 스승의 가르침과 실재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얻어지며, 목욕재계, 보시, 조식 기타의 행법으로는 그것을 깨달을 수 없다. 따라서 진아의 실상을 깨달아 해탈을 얻고자 열망하는 자는, 욕망에서 벗어나 있고 '브라만을 아는 자'이며 은총의 바다인 위없는 스승을 창장서 진아탐구(Atma-vichara)를 해야 한다. 역량 있는 사람들(상근기 구도자들)은 주로 탐구를 통해서 진아지知를 얻는다. 장소, 시간, 하느님의 은총은 그 지知를 얻는 보조수단일 뿐이다.
이해력, 곧 본질적인 것을 꽉 붙들고 비본질적인 것을 배제하는 (지성의) 힘 외에도 진아탐구(자기탐구)를 해내기 위해서는 경전에서 말하는 여러가지 자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어떤 것인가? 분별력이 있고, 집착이 없으며, 평온하고 절제되어 있고 성품이 순수하고 인내심이 있으며, 해탈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수행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 사람만이 브라만 탐구를 해낼 자격이 있다. 그 자격요건들은, (1)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의 분별, (2) 금생이나 내생에 자신의 행위의 열매를 즐기는 것에 대한 무욕, (3) 평온, 절제, 물러남, 인내, 믿음, 집중의 여섯가지 덕목, (4) 해탈에 대한 열망이다. 구도자가 브라만 아주(진아안주)를 성취하려면 실로 이러한 자질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질이 없이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이런 자질들은 (1) 브라만이야말로 진리이며 세계(현상계)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분별(viveka), (2) 브라마 이하의 유정(살아있는 존재)들이 즐기는 모든 쾌락은 무상하고 영원하지 않으며 슬픔과 결함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직접 보기도 하고 경전에서 배워 그런 쾌락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는 무욕, 곧 무집착, (3) 감각대상들의 불완전성(결함)에 대해 자주 명상함으로써 마음을 그 목표에 고정하고 그것들에 환멸을 느끼는 평온, 감각 대상으로 흘러가는 지식, 행위기관들을 제어하여 그것들을 그 각각의 영역(장소)에 고정하는 절제, 마음을 목표에 확고히 고정하여 그것이 대상을 생각하는 종래의 습에 끌려가지 않게 하고 (마음의) 모든 외부적 움직임을 포기하는 물러남, 어떤 슬픔이 닥쳐와도 그것을 피하지 않고 견뎌내는 인내, 베단타 경전과 스승의 말씀이 갖는 진리성을 확고히 신봉하는 결과이자, 브라만 개달음의 인이 되는 믿음, (바깥으로) 헤매는 습성을 가진 마음을 순수한 브라만에 고정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는 집중 등 삼매의 수행에 필요한 여섯 가지 자격 조건, (4) 시작 없는 무지로 인한 '에고와 몸의 속박'에서 벗어남을 자신의 진아에 대한 지로써 성취하려는 욕망인, 해탈에 대한 열망이다. 이런 열망은 평범한 수준의 것도 있고, 무욕과 평온, 절제 등의 자질을 구비하고 스승의 은총에 의해 계발된 수준의 것도 있다. 무욕을 갖추고 해탈에 대한 열망이 뜨겁게 타오르며, 평온, 절제 등의 자질을 구비한 경우에는 그것이 열매를 맺을 수 있으나, 그러한 열망이 약하면 그 결과는 신기루의 물같이 겉모습에 그칠 수도 있다.
그대 자신의 무지에서 비롯된 속박은 그대 자신의 노력으로만 제거할 수 있으며, 수천만 겁 동안의 무지한 욕망과 업에서 비롯된 온갖 속박의 고통은 자신의 명철한 지知의 눈으로써 브라만을 깨닫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배운 사람이라 해도 그것을 깨달을 수 없다. 해탈은 철학, 요가, 행위, 학식 등에 의해서가 아니라, 브라만과 자기의 동일성에 대한 지를 통해서 얻어진다. 경전공부도 쓸데 없으니, 그것은 바라는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이다.
해탈을 얻는 데는 영원하지 않은 것에 대한 무욕을 얻는 것이 선행조건이다. 그 다음은 평온, 절제, 인내, 일체의 활동포기(물러남) 등이 준비단계의 원인이 된다. 그 다음에는 베단타의 진리를 청문하고, 그 다음에는 그 진리를 성찰하며, 또 그 다음에는 오랜 시간동안 끊임없이 브라만에 대한 명상을 하는 것이 그 원인이 된다. 그러한 부단한 명상이 가져다주는 무상삼매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브라만 깨달음의 지라는 열매를 얻게 되고, 이로써 분별력 있는 영혼은 해탈의 지복을 지금 여기서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해탈에 이는 수단이다.
그대가 진정 해탈을 원한다면, 감각 대상들을 마치 독인 양 내버리고 만족, 자비, 관용, 성실, 평온, 자기절제 등의 순수한 성품을 확고히 붙들어, 몸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모든 행위를 포기하고, 무지에서 비롯된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부단히 노력하라. 이 몸뚱이는 결국 땅이나 불, 혹은 야수나 새들이 먹어버릴 것이다. 자신의 참된 성품을 망각하고 이 몸을 자기(진아)로 오인하는 사람은 몸에 집착하여 그것을 소중히 여기며, 그럼으로써 진아를 살해하는 자가 된다. 진아를 추구하면서도 여전히 몸을 아끼는 사람은 강을 건너기 위해 악어를 붙드는 사람과 같다. 몸에 대한 애착을 실로 해탈을 구하는 이에게는 치명적이며, 이러한 애착을 극복하는 자만이 해탈을 성취할 수 있다.
진흙에서 생겨났고 진흙의 성품으로 되어 있는 항아리 등 모든 질그릇이 진흙일 뿐이듯이, 브라만에서 생겨났고 브라만의 성품으로 되어 있는 이 세계도 브라만일 뿐이며, 꿈에서 나타나는 영원하지 않은 공간, 시간, 감각대상, 그것들을 아는 자 등 일체가 거짓된 것이듯이, 이 생시에 자신의 무지로 인해 나타나는 몸, 감각기관, 생기, 에고 등을 위시한 이 세계는 순전환 환幻이며 실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전체 세계는 유일하게 실재하는 브라만에서 방출되며, 브라만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극히 고요하고 완전히 청정한, 비이원적인 브라만이며, 진실로 '그대가 그것이다'. 그것은 탄생 등 여섯가지 몸의 변화(탄생,어림,성장,늙음,쇠약,죽음)나, 출신 계급, 관습, 부족, 가문, 이름과 형상, 특징이나 속성이 없고, 장점이나 결함, 정신적 질병이나 신체적 질병도 없으며, 배고픔, 목마름, 슬픔, 망상, 늙음, 죽음의 여섯 가지 악에서 벗어나 있고, 공간, 시간 혹은 객관 대상이 없으며, 어떤 언어로도 묘사할 수 없고, 지혜의 눈으로만 이해할 수 있고, 요기의 심장 안에서 드러나는 것이고, 어떤 감각기관에 의해 자각되는 것이 아니며, 거친 마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고, 미혹에 의해 투사되어 나타난 이 거짓된 세계의 바탕이며, 세계의 창조, 유지, 소멸의 원인이고, 결과인 이름과 형상의 모든 세계에 대해 원인이지만 그 자체는 어떤 원인도 없는 지고의 원인이며, 그러면서도 원인이나 결과와 별개이고 존재나 비존재와도 별개이고, 그것은 이름도 형상도 없고, 속성도 변성도 차별도 없고, 불균형도 없으며, 파도 없는 바다처럼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고, 영원하며, 무형상이고, 오점이 없고, 비할 바 없고, 차별상이 없고, 영구히 해탈해 있고, 불멸이고, 시작이 없고, 청정순수하며,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고, 단일하여 부분이 없고, 일체에 편재하고, 참된 지知이자 무한한 지복이며, 단일한 본질이자 이 모든 것인 브라만, '그것이 그대이다'. 이 진리를 예리한 지성으로 심장 안에서, 끊임없이 동요없이 늘 명상하라. 그러면 손바닥 안의 물같이 명백하여 의심할 수 없는 실재지知를 얻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알고 있어도, 강력한 윤회계의 힘 속에서 '내가 행위자고, 향유자다'라는 느낌의 장애가 시작 없는 원습으로 인해 종종 일어난다. 자기 자신보기(자기주시, 진아내관)로써 확고하게 자기 안에 머무르는 그대 자신의 노력으로 이러한 습들을 제어하라.
브라만과 자기의 동일성의 형상에 대한 지知를, 이 몸 안에 있는 '나'라는 관념이 자취 하나 없이 완전히 뿌리 뽑힐 때까지, 그리고 개아들과 세계가 하나의 꿈처럼 보일 때까지, 부단히 명상하여 얻어야 하며, 탁발을 하고 자연적인(생리적인) 기능을 여위하는 것 외에는 다른 일 없이, 언제 어느 때에나 잠이나 세속적인 대화, 혹은 감각 대상에 빠져 진아를 잊어버리는 일이 조금도 없게 하면서, 부단히 심장 안에서 집중하여 단 하나인 진아에 안주함으로써, 원습 없는 실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얻고 저 원습을 꾸준히 벗겨내어, 덧씌움의 결과로 끊임없이 나타나는 '나'와 '내 것'이라는 느낌을, 몸과 감각기관들에서 완전히 뿌리 뽑아야 한다.
배우가 (연극이 끝나면) 분장했던 배역을 포기하고 자신의 본래 모습을 지키듯이, 이 거짓된 몸 자아를 놓아버리고 몸-우주(소우주)와 브라만-우주(대우주)를 오물 덩어리처럼 여기면서, 부동의 일여한 마음으로 일여한 성품의 독존하는 브라만으로서 영구히 고요함에 안주하여, 지고의 평안을 얻도록 하라.
모든 것의 진아인 그는 자기 마음대로 무수한 형상을 취하며, 무수한 체험을 한다. 한 곳에서는 백치처럼, 한 곳에서는 학식 있는 사람처럼, 한 곳에서는 미친 사람처럼, 한 곳에서는 평안인으로, 한 곳에서는 대왕으로, 한 곳에서는 밥그릇이 없어 손으로 음식을 받아먹는 거지로, 한 곳에서는 존경받는 사람으로, 한 곳에서는 비방 받는 사람으로 돌아다닌다. 이와 같이 그는 어디서나 살아가지만 그의 이면에 있는 진리는 남들이 알지 못한다. 그는 부는 없어도 영원한 지복 안에 있는 자이고, 남이 도와주지 않아도 힘이 있는 자이며, 먹지 않아도 영원히 만족하는 자이고, 모든 사물에 대해 평등견을 지닌 자이고, 어떤 행위를 해도 그것을 함이 없는 자이며, 먹어도 먹지 않는 자이고, 몸을 가지고 있어도 몸이 없는 자이고,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일체에 편재하는 자이다. 이 몸의 속박에서 벗어나 브라만을 알고 해탈했으므로, 그는 몸에 집착하는 범부들처럼 좋고 싫음, 즐거움과 괴로움, 길함과 흉함에 의해 영향을 받는 일이 결코 없다.
<탐구보주화만>
Q: 나고 죽음 등 윤회의 불행을 실제로 체험하는데, 어떻게 그것이 제 안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A: 나고 죽음 등의 세계는 브라만의 형상인 자신의 진아를 모르는 그대의 무지에서 비롯된, 마치 밧줄 상의 뱀이나 하늘의 푸름, 혹은 꿈과 같은 환적인 겉모습이라는 것을 알라.반응형'나의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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