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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들의 삶과 가르침을 찾아서](정신세계사)나의 서재 2022. 12. 30. 23:20반응형
순간이동, 텔레파시, 동물과 대화, 오병이어의 기적 재현, 물위를 걷기, 병고침 등 예수 그리스도가 행했던 기적들을 인도, 몽골, 티베트 등지에서 당시 경험한 바를 베어드 T. 스폴딩이 기록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이어 흥미진진한 이야기거리로 두꺼운 책이었음에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르겠지만, 예수가 "내가 하는 일들보다 더 큰 일들을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충분히 현재에도 위와 같은 일들이 가능하다고 본다. 각 종교에서 일어나는 신유의 기적들을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성령이 역사했다고도 하고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이슬람에서는 알라가 역사했다고 한다. 양자 물리학의 발견으로 위와 같은 기적들의 현상이 실재하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는 것 같다. 알지 못했던 시기에 기독교계에서 뉴에이지 운동이라 이단시 했던 현상들이 실은 과학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다음의 내용은 책에서 발췌한 부분들이며 이견이 있는 부분은 의견을 달아보겠다.1895년
세포의 생명력은 결코 늙거나 죽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의 육체는 씨앗의 생명력과 같이 항상 젊고 싱싱할 수 있다. 사고와 같은 외부적인 요인이 없으면 인간에게 죽음이나 노쇠의 법칙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육체 또는 세포 집단 자체에는 소위 피할 수 없는 노쇠 과정이라는 법칙이 내재되어 있지 않으며, 인간을 점차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이란 일종의 외적인 사고이며 피할 수 있는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질병은 '평안에서의 분리(dis-ease)', 즉 마음을 통하여 육체에 반영된 영혼의 기쁜 평안을 의미하는 산티(힌두어 Santi)의 결여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인간이 공통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노쇠 현상은 마음과 육체의 평안하지 못한 상태인, 원인의 무지를 덮어두는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외적인 사고조차도 사실은 정신 자세에 따라 피하거나 막을 수 있습니다.
두려운 생각, 고통스러운 생각, 슬픈 생각 등이 늙음이라는 추한 환상을 창조해냅니다. 반면에 기쁨과 사랑과 이상은 젊음이라는 아름다움을 창조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갖도록 훈련하십시오. 잠들기 전에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나는 지금 내 속에 영원히 아름답고 젊은 영적인 몸이 깃들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신성한 어린이의 몸인 나의 아름다운 영적인 몸은 마음, 눈, 코, 입, 피부 모두가 완전하다.' 이러한 긍정을 스스로에게 계속 말하고, 이러한 명상이 고요하게 지속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어린아이와 같이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미소 짓는 법을 배우십시오. 영적인 평안함의 표시인 마음에서 비롯되는 참된 미소는 '불멸하는 내면의 주재자'의 예술작품으로서 진실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나는 온 세상을 위하여 친절한 생각을 품고, 세상 만둘이 행복하기를 원한다.' 라고 긍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스스로 '내 안에 완전한 신성이 거하고 있다. 나는 매일 나의 아름다운 실상이 현실로 나타날 때까지 그것을 마음속에 그린다. 나는 신성한 어린이이고, 나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채워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부족함 없이 채워질 것이다.'라고 긍정하십시오.
하느님은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거나 의미 없는 말을 되풀이하는 기도를 들으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들 내면에 있는 하느님과의 연결점인 내적인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찾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우리들 내면에 있는 아버지를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그때 그는 자신을 향해 열린 우리들 영혼의 간구를 들으십니다. 내면 깊은 곳에서 아버지와 은밀한 관계를 맺은 사람은 자신의 모든 소망을 이루는 힘이 자신을 통하여 흘러넘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만일 자기가 알지 못하고 있던 진정한 자기 자신을 알고자 한다면 자신의 은밀한 골방인 내면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자기의 가장 위험한 적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적을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 적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고, 그 적을 다스릴 수 있게 되면 자기 자신이 가장 진실한 친구로 또 가장 지혜로운 스승이자 조언자로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또 하느님은 깊은 침묵 가운데에 계시며, 자기 속에 하느님이 거하시는 깊은 침묵에 휩싸인 지성소가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깨달음이 주어지면 자신의 모든 소원이 자신의 소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 안에 있는 하느님의 소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하느님과 인간, 아버지와 아들 혹은 영혼과 육체 간의 친밀한 관계를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깊은 의식 차원에 도달하면 서로 별개의 존재로 보이는 하느님과 인간이 사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게 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선한 소원은 하느님의 소원입니다. 따라서 선한 동기에서 비롯되는 모든 필요는 보편적인 실체인 하느님으로부터 무제한적으로 공급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창조해놓으신 것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모든 제한에서 해방되어 풍성한 자유를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의식에 관해 이러한 깨달음을 얻게 되면, 다음에는 자연히 모든 개인이 하느님의 마음속 생각의 표현이며, 따라서 하느님의 마음속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그려진 존재라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는 이러한 상태가 되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수계서는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에서 빵을 구할 수 있겠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것은 빌립의 믿음을 시험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은 광야로 모여든 군중들을 먹이기 위해서 빵을 사지 않아도 충분히 공급할 수 있다는 사실과 또 그 당시 시장에서는 그 많은 사람이 먹을 만한 양의 빵을 살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때를, 하느님의 영적인 권능으로 빵을 부풀려낼 수 있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입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빌립처럼 물질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빌립은 오늘날에도 인간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생각을 전재했습니다. 그는 그 많은 사람들이 먹으려면 얼마만큼의 빵이 있어야 하며, 그만한 빵을 사기 위해서는 돈이 얼마나 리요한지 재빠르게 계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리스도 의식 가운데에 있는 자에게는 아무런 한계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 의식 가운데에서, 만물의 근원이자 창조자이신 하느님을 우러러보며 자기에게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자들을 시켜 굶주린 사람들에게 빵을 뎨어 나누어주도록 했습니다. 빵은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을 때까지 공급되었고, 그러고도 열두 광주리 이상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이 먹고 남은 빵을 가지고 그러한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은 모두 만물이 생성되어 나오는 보편적인 실체세계(Universal Substance)에 이미 존재하고, 그 실체세계는 '지금-여기'에 현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와 같이 우리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최고의 법칙인 하느님의 절대 법칙을 사용하여 우리들이 원하는 것 또는 우리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이상이 현실로 나타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하느님께서 점점 더 풍성하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추세로 상업주의가 번져나간다면 머지않아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모두 금전의 힘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고, 상업주의 자체와 거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모두 파멸되는 상황이 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아무리 전능한 창조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생각과 소원을 질서있게 정리해서 '그것이 있으라.'라고 명확히 말해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대로 창조자가 되고자 한다면 바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분명히 그린 다음 '그것이 있으라.'라는 식의 확신 있는 태도를 취해야만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양을 따라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시는 것처럼 창조하는 능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들도 자신처럼 또 자신과 똑같은 방법으로 창조력을 자유롭게 사용하게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창조 과정이나 방법은 이러합니다. 처음에는 필요를 느끼고, 그 다음에는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려서 의식 속에서 그것을 확고히 한 다음, 보편적인 실체세계에서 질료를 이끌어와 필요로 하는 것을 창조해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마음속에서 형상화해서 '있으라!'라고 한 그대로 아름다운 현상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순수하고 영적인 상태에서 어떤 사물의 형태를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으면 파동이 점점 낮추어져서 우리가 바라는 사물이 완전한 모습으로 창조되어 나옵니다. 씨가 자라기 위해서는 먼저 껍질을 벗어야만 하는 것처럼, 우리도 성숙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유한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자아의 껍질을 벗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자아의 껍질을 벗은 후, 완전을 추구하는 내적인 힘이 계속 작용하여 꽃처럼 아름답게 활짝 피어날 것입니다.
불길 속을 통과해 나오고 있는 중에 에밀 대사가 말했다. "우리는 지금 우리 몸의 진동을 불의 진동보다 더 높인 상태이기 때문에 불의 피해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면 그는 우리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그 어려움의 진동보다 우리 의식의 진동을 더 높임으로써 극복해냅니다. 우리는 이렇게 의식의 진동을 높이는 방법을 사용하여 인간이 감각적인 의식으로 스스로에게 부과한 모든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비교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볼 때 항상 그리스도만을 봅니다. 이것이 우리가 여러분과 다른 점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불완전함을 보지만 우리는 완전함을 봅니다.
모든 생각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오는 완전한 것임을 깨닫고, 좋은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그것을 자기가 구현해야 할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자기가 하고자 하던 노력을 거두고 자기를 통해 하느님께서 완전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도록 자기를 맡긴다면 그 생각은 완전한 형태로 현실과될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평화와 조화가 있다는 생각은 맞습니다. 그러나 천국을, 어떤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도시 정도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의견: 사탄이나 마귀도 인간이 만들어낸 상념이라고도 나와있는데 그렇다면 완벽히 만들어진 인간에게 어떻게 악이라는 불순물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이사야서에 나오는 천사장의 타락 이야기는 무엇인가? 완벽히 창조된 천사장조차도 교만으로 저주를 받아 사탄이 되었는데 그 사탄이 선악과로 아담과 하와를 범죄하게 한 것이 아니면 어떻게 인간 스스로 하나님과 분리된 생각으로 죄를 지을 수 있겠는가?)
우리 대원 한 사람이 생각이나 말의 힘이 현실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에 대해서 질문했다. 그러자 그녀는 손을 내밀었고, 그 순간 어떤 작은 물체가 그녀의 손에 나타났다. 그녀가 말했다. "이 조약돌을 물에 담긴 그릇에 떨어뜨려보겠습니다. 자, 조약돌이 떨어진 곳을 중심으로 물결이 원을 그리며 번져나가 물이 끝나는 그릇 가장자리에 닿는 순간 그 힘을 잃어버리고 정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더 퍼져나갈 수 없는 한계에 닿는 순간, 물결의 힘은 다시 본래 출발해 나온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조약돌이 떨어진 자리에 다다르기 전에는 그 힘이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생각이나 말도 이와 똑같습니다. 생각이나 말의 진동도 원을 그리며 끝없이 퍼져나가, 드디어는 우주를 돌아 본래 그 생각이나 말의 진동을 내보낸 사람에게로 돌아옵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우리가 생각하거나 말한 것은 여지없이 우리에게로 돌아옵니다. 여러분의 성서에서는 이 돌아오는 것을 '심판'이라고 부르며, .. 좋은 것을 내보내면 좋은 것을 받고 나쁜 것을 내보내면 나쁜 것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모든 상념은 씨가 되고, 그 씨는 영혼 속에 심어져 마음속에서 구체적인 생각으로 발전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품은 그 구체적인 생각이 물질적인 형태의 현상을 나타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것을 마음으로 그리면 완전한 것이 나오고 불완전한 것을 그리면 불완전한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1896년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나 불신앙을 몰아내고, 영혼 깊은 곳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주어졌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뻐해야 합니다.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은 마음이 흩어지지 않고 하나 되는(at-one-ment)데 있습니다. 온 세상이 자기를 반대할지라도 정신을 차리고 하느님만 의지하는 흩어지지 않는 마음만이 기도의 응답을 가져옵니다. 기도를 드릴 때는 완전한 상태를 구하는 긍정적인 말만을 하고 부정적인 말은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기도할 때는 병을 고쳐달라고 구살 것이 아니라 건강한 상태가 되기를 구해야 할 것이고, 불화와 갈등에서 건져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조화로운 삶이 되기를 구해야 할 것이며, 궁핍을 면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풍요로움이 넘치게 되기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속의 빈 공간을 무한한 선이신 하느님에 대한 생각으로 채우십시오.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씨가 되어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반드시 나타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는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여러분은 단지 구하는 순간 이미 얻었다는확신을 가지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원하는 것을 말하기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모두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실 일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실 일에만 충실하고 하느님이 하실 일은 하느님께 맡기시라는 말씀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원하는 것을 구하면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상념의 파동을 끊임없이 대기 속으로 방사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 방사된 상념의 파동을 모을 수도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어 생명력을 잘 보존하고, 그것을 성적 욕망이나 정욕에 의해 일그러뜨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신경 계통을 통해 몸의 구석구석으로 내보낸다면 상쾌함이 넘치는 활기가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우에는 성적인 오르가슴을 훨씬 능가하는 쾌감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생명의 진액이 피보다 몇 배나 더 중요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 소모하는 대신 보존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백 피트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차가운 눈보라가 맹렬하게 몰아치고 있는데, 우리가 있는 곳은 따뜻하고 잠잠했다. 우리가 겪은 바에 의하면 그런 눈보라가 불어닥치면 추위가 극심하여 마치 살을 에는 듯했으며 바람에 날리는 눈가루를 맞으면 바늘로 찌르는 듯이 따가웠다.
자연 재해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만 임하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확고부동한 자세로 하느님만을 응시함으로써, 하느님만을 알고 여타의 것에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을 때 지금 여러분이 경험하고 있는 것과 같은 놀라운 상태를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인간이 내면의 목소리를 거부하고 빗나가기 전까지는 삶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다시 돌아서서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게 되면, 일하는 것이 생존을 위한 고통이 아니라 창조의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내면의 목소리에 순종하면, 창조의 즐거움이 넘치는 세계로 들어가 필요한 것들을 주님의 법칙, 즉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해내는 삶을 살게 됩니다.
마음을 하느님과 하느님의 완전에 집중하게 되면 육체의 진동이 높아지는데, 높아진 육체의 진동은 하느님의 완전한 진동과 공명하게 되고 결국은 여러분 자신이 하느님과 하나가 됩니다. 그런 상태에 도달하면 하느님의 마음과 일치된 진동을 통해서 여러분과 접촉하는 사람들의 육체의 진동에 영향을 줄 수 있고, 그들로 하여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완전함을 보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하느님의 마음, 즉 여러분 속에 존재하는 하느님의 나라만을 바라보는 훈련을 계속해나간다면, 어떠한 부조화한 상황과 만나더라도 즉시 신적인 이상을 향해 마음의 눈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구하는 자를 치유해주기 위해 늘 준비하고 있는 신적인 사랑이 모든 부조화를 깨끗이 제거해줄 것입니다.
심장 바로 뒤에 있는 사랑의 자리인 그리스도의 보좌를 일념으로 응시하는 것을 통해서도 자기 속에 있는 그리스도가 나타나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보좌에 정신을 집중하여 보좌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가 육체의 모든 행동을 하느님의 법칙에 완전히 일치하도록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신적인 마음에서 직접 오는 이상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는 명상입니다. 세표, 섬유질, 근육, 그리고 신체 기관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을 확장해나가면 결국에는 몸 전체가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몸 전체가 하느님의 독생자 그리스도가 되며, 하느님께서 기뻐게 거하시는 깨끗한 성전이 됩니다.
1897년우주 속에 편재한 보편적인 근본 요소나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 입자들을 결합시켜 어떤 특정한 형태를 이루도록 하려면, 그렇게 되도록 하는 처음 움직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구체적인 형태를 마음속으로 그리고 거기에 상념을 집중할 때 비로소 그렇게 되도록 하는 처음 움직임이 시작됩니다.
하느님은 거룩한 성전에 계신데, 그 성전은 다름 아닌 여러분의 육체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하느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만물이 깃들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육체를 귀히 여기게 되는 순간, 여러분의 육체는 신적인 원리를 쏟아내는 그릇, 즉 생명 에너지를 발산하는 도구가 됩니다.
하느님이 여러분 속에 내재하고 있는 신적인 대원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는 그 이름을 부르면 부를수록 그만큼 육체의 진동이 높아집니다. 의미를 확실히 알고 '하느님'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그 말을 사용하기 이전과 사용하고 난 이후의 육체의 진동이 달라집니다. 하느님이라는 말은 가장 높은 진동수를 갖고 있는, 아주 강력한 대우주의 진동입니다. '하느님'이라는 말로 자신의 내면을 채우고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다툼과 혼란으로 가득 찬 세상이 여러분을 절대 괴롭히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을 찾아서참된 지식은 삼매, 즉 침묵에서 온다. 참된 지식은 내적인 느낌이요, 직관적인 앎이다. 우리 마음속 갚은 느낌을 따르는 것이 올바른 지혜를 가지는 길이다.
마치며이 책의 진위여부를 떠나 모든 부분에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미혹하기 위해 고도의 계산으로 책을 만들어낸 것인지 아니면 정말 실제 사건만을 기록한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운 것 같다. 그럼에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들과 기적들을 보면 저러한 이상적인 세계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가져보게 된다.
국선도 단전호흡, 명상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정신과 마음의 중요성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하나의 진리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 십자가 사건으로 무덤이 열리고 자던 성도들의 몸이 일어나 예수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와 몸을 보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마27:52) 예수의 부활사건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고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지 않는 것 같다. 몇 백살을 살았다는 노아 홍수 이전 시대와 같이 지금 이 시대에도 어딘가 영생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젊음과 아름다움, 순수함과 완전함을 추구하며 삶을 살아야겠다.반응형'나의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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