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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꿈과 잠 명상 - 마음의 본성으로 돌아가는 현대인의 수행법나의 서재 2025. 2. 20. 14:09반응형
The Tibetan Yogas of Dream and Sleep 1998 by Tenzin Wangyal Rinpoche
우리는 영적 여정을 위해서는 물론이고, 남을 도우려는 우리의 염원을 위해서도 수행이 필수적임을 알고 있다. 우리는 또한 삶이 얼마나 짧은지, 죽음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잘 알고 있다. 이 모두를 알고 있음에도, 우리의 삶은 바쁜 일정으로 돌아가기에 수행을 위한 시간을 마련하기가 어렵다. 어쩌면 매일 한두 시간 정도를 명상에 투자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나머지 스물두 시간은 육도윤회의 파도에 떠밀려 산란한 마음으로 지내게 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잠을 자는데 시간을 쓸 수밖에 없으므로 인생의 3분의 1을 수행의 시간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 책의 중요한 주제는 삶의 그 어떤 순간도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자유로워지고 융통성이 생겨서 습관적인 집착이나 산만함에 지배받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우리가 안정적이고 생생한 현존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더 능숙하게 긍정적 반응을 선택할 수 있다. 이러한 긍정적 반응은 우리 자신의 영적 여정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굉장히 이롭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깨어 있는 삶뿐만 아니라 꿈에서도 완전한 자각을 유지할 수 있는 인식의 연속성을 계발하는 것이다. 이 수준에 이르면 꿈 현상에 대해 창의적이고 긍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으며 꿈속에서 다양한 수행을 성취할 수 있다. 또한 이 능력이 완성되면 꿈꿀 때나 깨어 있을 때 모두 더 큰 안락함, 편안함, 명료함, 감사함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사후의 죽음, 즉 바르도(죽음과 환생사이)에서 해방을 성취하기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꿈과 잠 요가의 궁극적 목표는 해탈에 있다는 것을 상기하라. 이 책의 목적에 알맞게 수행하길 원한다면 자격 있는 스승을 만나 지도를 받도록 하라.
우리는 이미 육도윤회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삶을 반복하였다. 단순히 영성에 관한 어떤 책을 읽고 금방 잊어버리는 것은 우리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하지만 꿈과 잠 요가를 철저하게 수행한다면 우리는 깨달음 그 자체인 마음의 본성으로 깨어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꿈에서 마음의 투영에 불과한 그것이 마치 현실인 것처럼 반응한다면 죽음 후의 상태에서도 자유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꿈속에서의 경험을 잘 살펴보면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지 알 수 있다. 또, 잠의 경험을 잘 살펴보면 스스로 진정 깨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영적 지도를 받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귀로 듣기, 깊이 사유하기, 수행에 적용하기'이다. 이는 귀로 들은 것을 지적으로 이해하고, 깊이 사유하여 그 의미가 무엇인지 꿰뚫고, 그것을 수행에 적용해보라는 뜻이다. 배움이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면 배움의 과정은 계속되어 끊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적인 이해에서 멈추게 되면 그것은 수행에 걸림돌이 된다.
가르침의 핵심을 꿰뚫는 일은 어두운 방에 불을 켜는 것과 같다. 그동안 가려져 있던 것이 명확해진다. 가르침의 여러 조각들이 딱 맞아떨어져 분명히 이해될 때 일어나는 '아하' 경험이다. 이는 단순한 개념적 이해와는 구분된다. 가르침을 듣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정한 앎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수행에 적용한다'는 것은 개념적으로 이해되어온 것, 즉 받아들이고, 숙고하고, 의미 있게 만든 것을 직접적인 경험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한 번도 소금을 맛본 적 없는 사람에게 소금을 열심히 설명한다고 해도 그들은 우리가 경험한 것이 무엇인지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맛본 사람과 소금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가르침은 이 같은 것이며 배움의 과정도 이와 동일하다.
꿈을 수행으로 전환하는 첫 단계는 매우 간단하다. 바로 꿈이 우리를 영적 여정으로 인도하는 위대한 잠재력이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꿈은 깨어 있을 때의 삶인 '현실'과는 달리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꿈보다 더 현실적인 것은 없다. 이 말은 평범한 우리의 삶이 꿈만큼이나 비현실적이며 그들은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생겨난다는 것을 깨달은 후여야만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밤의 꿈뿐만 아니라 깨어서 꾸는 꿈에도 꿈 요가를 적용할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티베트 전통에서는 무지(진리에 대한 앎의 부족)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선천적인 무지와 문화적인 무지가 바로 그것이다. 선천적인 무지는 윤회의 이유이며 일반적인 사람들의 특징이다. 이는 인간과 세상의 진정한 본질에 대한 무지이며, 우리를 이원론적 마음의 망상과 얽히게 만든다.
이원론은 통일된 하나의 경험을 이것과 저것, 옳은 것과 잘못된 것, 당신과 나로 분리하여 양극화와 이분법의 논리를 강화한다. 이러한 개념적 분별을 바탕으로, 우리는 욕망이나 혐오 같은 선호도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선호도에 따른 습관적 반응이 우리의 자기규정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이것을 원하지만 저것은 원하지 않으며, 이것은 믿지만 저것은 믿지 못한다. 우리는 기쁨, 안락함, 부, 명성을 원하지만 고통, 가난, 수치심, 불편함에서는 벗어나려 한다.
두 번째로 문화적으로 조건화된 무지는 욕망과 혐오가 문화 안에서 제도화되고 가치 체계로 자리 잡으면서 생긴다. 예를 들어 각 종교인들은 각자가 옳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서로 충돌하는 각기 다른 신념은 근복적인 지혜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편견 및 문화적인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어떤 가르침이라도 결국 우리의 무지를 견고히 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어떤 것에 집착하거나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똑같이 이원론의 낡은 게임이며, 이는 무지의 영역에서만 펼쳐진다. 역설적이게도, 무지의 이원론은 무지를 극복하는 데 쓰인다. 더 높은 관점에서 사물을 보면 모두 평등하게 보인다. 비이원적 지혜의 관점에서 보면 특별히 중요한 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도 없다.
우리가 속한 문화권은 우리를 조건화한다.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것은, 실제로는 우리 마음속에 있다. 우리는 환경과 상황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상황을 바꿀 수 있다면 행복해질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은 그저 우리 고통의 이차적 원인일 뿐이다. 고통의 근원적인 원인은 선천적인 무지와 그로 인한,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다.
우리는 도시의 스트레스를 피해 바다나 산으로 떠난다. 아니면 시골 생활의 고립과 고단함을 떠나 도시의 흥분을 느껴보기도 한다. 변화는 좋은 것일 수 있다. 이차적 원인이 바뀌면 그에 따른 만족감이 생기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다. 불만의 근원은 우리를 따라 새집으로 옮겨왔고, 또다시 새로운 불만이 자라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다시 한번 희망과 두려움이 뒤섞인 혼란에 빠지고 만다.
부자라고 해서 고난에서 벗어날 수 없고, 멋진 새 파트너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불만을 느끼게 될 것이며, 몸은 노화될 것이고, 새로운 직업에 대한 흥미는 줄어들 것이다. 불행에 대한 해결책을 외부 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욕구는 일시적으로만 채워진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욕망의 바람에 의해 마음이 산란해져 불안과 불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카르마(업)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미래에 수확할 업의 씨앗을 계속 심고 있다. 이러한 행동 방식은 우리를 영적인 여정에서 멀어지게 할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만족과 행복을 찾지 못하도록 막는다.
외적이든 내적이든, 깨어 있을 때든 꿈에서든, 어떠한 상황에 대한 반응은 집착과 혐오에 기반하는 것이며 이는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업이 명령한 반응은 더 많은 업의 씨앗을 뿌린다. 그리고 이 씨앗은 다시 반응을 명령한다. 그렇게 계속 이어진다. 이것은 업이 또 다른 업으로 우리를 이끄는 방법이자 윤회의 바퀴이며, 행동과 그것에 대한 반응의 끊임없는 사이클이다. 업의 흔적이 그보다 더 큰 업의 지배를 받는 행동의 씨앗이 된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면, 이를 활용해 삶의 부정성을 창조하는 것을 피하고 우리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상황들을 창조할 수 있다. 아니면, 우리는 감정이 생겨날 때와 마찬가지로 감정이 스스로 해방되도록 허용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새로운 카르마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모든 업의 흔적은 우리를 제약하며 특정한 정체성에 한정되게끔 작용한다. 수행의 목표는 모든 조건화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업의 경향성에 휩쓸리지 않게 될 때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밀고 당겨지기보다는, 우리의 상황을 보다 명확하게 볼 수 있으며 더 자연스럽고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다.
영적 여정은 우리의 먼 미래나 다음 생에만 유익한 것이 아니다. 어떤 상황들 속에서 더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훈련을 하면 우리 업의 흔적을 바꿀 수 있게 되며, 우리가 이끌어가고 있는 바로 지금의 삶에도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자질을 계발할 수 있다. 아무리 작고 사소한 경험일지라도 모든 경험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보다 명료하게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의 삶과 꿈을 변화시킬 수 있다.
꿈 요가에서는 이러한 업의 이해를 영적 수행에 더 도움이 되는 꿈을 만들어내는 데 사용한다. 그러면 어떤 경험에 대해 달리 반응하도록 마음을 훈련시킬 수 있고 업의 흔적도 새로이 만들어진다. 꿈 요가는 인식과 통찰력이 향상되면 삶에서 긍정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다고 믿는다. 경험의 역동적인 구조를 이해하고 행위의 결과를 이해하면 모든 종류의 경험이 영적 수행의 기회가 된다는 인식이 생긴다. 우리가 꿈을 꾸는 동안 의식에 머무를 수 있다면 업의 흔적이 드러났을 때 그것이 스스로 해방되게끔 허용하여 더 이상 업의 흔적이 우리 삶에서 부정적으로 표출되지 않게끔 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어두운 것들을 정화하면 더 이상 현상될 사진도 없고 우리 의식의 빛의 형색에 영향을 주는 숨겨진 업도 없게 된다. 업의 흔적이 완전히 고갈되면 오로지 의식의 순수한 빛만 남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도, 이야기도, 꿈꾸는 사람도, 꿈도 모두 사라지고 빛나는 근원적 본성만이 절대적 실제가 된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 꿈의 끝이자 '깨어남(awakening)'으로 알려진 이유다.
삶 속에서 유쾌한 시간을 즐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제약되고 잘못된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우리가 탐욕에 빠지면 내면보다는 외부로부터 만족을 얻으려 하는데, 우리가 벗어나고자 하는 공허함을 충분히 채울 만한 것은 거기서 절대 찾아지지 않는다. 우리가 진정 갈망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앎이다. 지혜는 우리가 내면으로 시선을 돌려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알게 되었을 때 찾아지는데, 이것이 무지에 대한 해독제가 된다.
서양의 많은 사람들은 부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감정을 만나면 불편해하지만, 감정 그 자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애착, 분노, 교만, 질투 등을 포함한 모든 감정은 생존에 도움이 되며 인간의 경험 폭을 다채롭게 채우는데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감정들에 빠져 우리 자신의 더 깊은 면과 접촉할 수 없다면 그것은 부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집착이나 혐오로 어떤 감정에 대해 반응하면 우리의 의식과 정체성이 편협해져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이는 미래의 부정적 업의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현실의 본성이 공한 것임을 이해하고 경험한다면, 더 이상 집착도 없을 것이고 다른 감정보다 더 중요한 감정 유형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상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무지는 우리 마음이 투사한 것들이 실제하고 여기게끔 하며, 우리가 그것에 집착하게 만든다. 우리는 환상과 이원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 관계 속에서 분노나 탐욕, 아니면 다른 감정적 반응을 느낀다. 절대적 현실 속에는 분노의 대상이 되는 분리된 독립체 혹은 어떤 감정에 대한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분노할 어떤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야기를 창조해내고, 투사하며 그와 동시에 분노한다.
다양한 자세들은 몸속 에너지의 도관 역할을 하는 채널을 조절하여 에너지적 중심점인 차크라를 열어주고 프라나의 흐름을 바꾼다. 이렇게 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경험을 불러온다. 우리 몸의 에너지를 의식적으로 운용하면 우리가 마음에만 의지할 때보다 더 쉽고 빠른 명상 수행의 발전이 이루어진다.
우리에게는 3 가지 뿌리 채널이 있다. 세 개의 뿌리 채널은 여성의 경우 신체 오른쪽에 빨간색, 왼쪽에 흰색, 중앙에 파란색 채널로 자리하고 있다. 남성의 경우 오른쪽이 흰색, 왼쪽이 빨간색 채널이다. 세 개의 뿌리 채널은 배꼽 아래 10센티미터 지점에서 서로 연결된다. 흰색 채널은 부정적인 감정 에너지가 움직이는 통로다. 빨간색 채널은 긍정적인 혹은 지혜 에너지의 통로다. 따라서 꿈 수행에서는 남자는 오른쪽으로, 여자는 왼쪽으로 눕게 한다. 이렇게 하면 흰색 채널에 압력이 가해져 약간 닫히는 반면, 지혜의 통로인 빨간색 채널은 열리기 때문이다. 파란색 중앙 채널은 비이원적인 채널이다. 이 중앙 채널에서는 원초적인 의식의 에너지(릭빠)가 움직인다. 꿈 수행은 궁극적으로 의식과 프라나를 부정적, 긍정적 경험을 넘어선 중앙 채널로 가져온다. 이렇게 되면 수행자는 이원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하나임을 깨닫는다.
<프라나의 균형>
프라나의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간단한 수행이 하나 있다. 남자는 왼손 약지를 사용하여 왼쪽 콧구멍을 닫고 오른쪽 콧구멍으로 숨을 강하게 내뿜어야 한다. 모든 스트레스와 부정적인 감정들이 날숨과 함께 흘러나간다고 상상하라. 그런 다음 오른손 약지로 오른쪽 콧구멍을 닫고 왼쪽 콧구멍을 통해 깊고 부드럽게 숨을 들이쉰다. 숨을 들이쉰 후에는 짧은 시간 동안 들이쉰 숨을 유지하면서 모든 공기와 프라나가 몸 전체 퍼지도록 놔두라. 그런 다음 부드럽게 숨을 내쉬고 평온한 상태에 머무른다. 여자는 남자와 반대로 한다. 이것을 반복하면 에너지가 균형 잡힌다.
인간의 진정한 본성은 개념적인 마음이 만든 근원적인 무지에 의해 가려져 있다. 이원적인 시야에서, 개념적인 마음은 경험의 경계가 없던 통합을 개념적인 독립체로 나누고, 이러한 정신적 투사들을 마치 원래부터 분리된 존재 및 사물이었던 것처럼 이해한다. 근원의 이원론은 경험을 자신과 타인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규정으로부터 오직 경험의 한 측면, 즉 자신만을 겪게 되며 선호하는 것이 생긴다. 바로 여기서 신체적, 정신적 행동의 바탕이 되는 혐오와 욕망이 발생한다. 업의 프라나는 마음이 색깔, 빛, 감정, 이미지 같은 특정한 업의 흔적들의 표현을 유의미한 이야기, 즉 꿈으로 엮어내는 동안 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에너지이다. 이것이 바로 윤회하는 세상의 꿈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세상은 꿈이고 스승과 가르침도 꿈이며 우리가 한 수행의 결과 또한 꿈이다. 우리가 순수한 릭빠에 이르러 해탈할 때까지는 꿈 아닌 것이 없다. 우리는 망상, 고통, 어떠한 경험 등 모든 것을 영적 여정에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모든 것이 공한 것이라는 정수를 이해해야만 한다. 이렇게 되면 삶의 모든 순간이 자유로워지며, 모든 경험이 영적 수행이 된다. 모든 소리는 만트라이며, 모든 형상은 순수한 공이고, 모든 고통은 가르침이다. 이렇게 삶 자체가 깨달음의 길이 된다. 진정한 이해가 없으면 우리는 자기 마음의 투영을 실제로 착각하고 혐오 또는 집착으로 반응하여 업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진정한 본성인 공을 알게 되면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육도윤회에는 좋은 면도, 나쁜 면도 있는데 수행과 가르침에 대한 완전한 전념은 해탈에 이르는 길이므로 좋은 것이다. 우리는 꿈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무엇이 주목할 만한 것인지, 그리고 무엇이 우리의 일상 속 욕망, 두려움, 희망, 환상, 감정들의 표출일 뿐인지에 대한 분별력을 키워야 한다.
때로 학생들은 미래에 대해 뭔가를 알려주는 꿈이 우리의 미래가 정해져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지 묻는다. 티베트 전통에서,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의 원인은 이미 지금 여기에 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과거의 결과가 미래의 상황을 만드는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미래에 일어날 어떤 상황에 대한 주요 원인들은 이미 발생한 것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업의 씨앗이 발현되는데 필요한 이차적 원인은 정해져 있지 않고 상황에 달려 있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수행이 효과가 있는 것이며 질병이 치료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즉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면 무언가를 시도할 이유가 전혀 없다. 만일 우리가 내일과 관련된 어떤 꿈을 꾸고 다음날 모든 것이 그 꿈과 똑같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미래가 정해져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바꾸지 않았다는 의미다.
해몽에 대한 우리의 열망은 희망과 두려움에 기반한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피하고 무엇을 취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한다. 우리는 뭔가를 바꾸기 위해 이해를 얻고자 한다. 그러나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깨닫게 되면 의미를 찾지 않게 된다.왜 굳이 의미를 찾아야 한단 말인가? 희망과 두려움을 넘어설 때, 꿈의 의미는 중요해지지 않는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것을 충만히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경험도 불안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비이원적, 비인습적 현실에 적용되는 가르침들은 성취할 그 어떤 것도 없다고 단언한다. 또, 무언가를 구하는 것은 곧 잃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데, 이는 구하려는 노력이 그 사람의 진정한 본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이런 점이 다소 혼란스럽기에 수행자는 수행에 관해서도 혼란을 느낄 수 있다. "궁극적인 현실이 분별조차 없는 비어 있는 상태라면, 그리고 해탈이 이 공한 본성을 깨달음으로써 찾아지는 것이라면, 나는 왜 상대적인 결과가 목적인 수행을 해야 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이원적이고 상대적인 세계에 살고 있으므로 그러한 세상에서 효과를 발휘하는 수행을 하는 것이다. 육도윤회의 존재에게는 이분법과 양극성이 의미를 지닌다. 그들의 생각과 행동에는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이 있다. 당신을 속박하고 있는 그 상황들을 존중하라. 육도윤회의 삶에서는 관습적인 수행과 해몽이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했기에 해몽이 필요했었다. 그러나 나의 그런 요구가 두려움과 이원론에 근거했다는 점, 또 내가 비이원적 현존에 머무른다면 두려움이란 없으며 해몽 또한 필요하지 않다는 점을 깨닫는 것은 내게 중요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에 유용한 것을 사용하면 된다. 우리가 오직 마음의 진정한 본성 속에서만 살아갈 때, 현실은 진정으로 분별이 없는 공한 것이 되고, 그러면 우리는 상대적인 수행들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진리 속에 살고 있으면 꿈의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어진다.
우리의 관습적인 삶 속에서는 무언가를 선택하고 바꿀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가르침을 공부하는 이유이며 수행을 하는 이유이다. 삶에 더 능숙해지고 삶을 더 많이 이해할수록, 우리는 더 유연해진다. 우리는 자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하는 경험에 있어 망상에 불과한 것이 무언인지, 고통은 어떻게 생기는 것인지, 우리의 진정한 본성은 무엇인지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하는 무언가가 더 큰 고통을 유발하고 있음을 한 번 깨닫기 시작하면, 우리는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있다.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 상태를 놓아버리고, 우리를 산란하게 만드는 것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훈련시키고, 순수한 현존에 머무를 수 있다.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꿈 요가를 사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어떤 수행들은 상대적인 관심사들을 다루며 건강, 점괘, 지침, 불건전한 업과 심리적 경향의 정화, 치유 같은 것들을 목적으로 꿈을 활용하도록 한다. 영적인 길은 실용적이며 어디에나 적합한 것이다. 꿈 요가를 활용하여 상대 세계에서 유익을 얻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상대적인 상황들을 단순히 개선시키는 것을 넘어, 상대 세계에서 해탈하는 데 꿈을 쓰길 원한다.
잠든 후 꿈속에 들어가는 것처럼, 우리는 죽은 후에 바르도, 즉 중음으로 들어간다. 만약 꿈의 경험에 명료함이 결핍되어 있고, 감정적 상태와 습관적인 반응성으로 혼란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죽음의 과정을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경험하도록 스스로를 훈련시키는 꼴이 될 것이다. 우리는 중음에서의 광경에 이원적으로 반응하여 더 강한 업의 속박에 끌려다니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환생은 이번 생에 구축해왔던 업의 경향성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르도 속의 알아차림이 없는 존재'의 의미다.
반면, 우리가 매 순간의 경험 속으로 알아차림을 가져올 수 있다면, 이 능력을 얼마 지나지 않아 꿈속에서도 드러날 것이다. 꿈속에서 현존을 연습하는 것은 죽음에 대비하는 것과 같다. 꿈 수행은 죽음의 과정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수행의 진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의 안정성을 키워야 한다.
경험 속으로 더 깊은 알아차림을 가져올 때, 우리는 인습적인 마음의 망상에 기초한 습관적인 반응을 극복할 수 있다. 앞으로 소개할 네 가지 기본수행은 깨어있는 동안 경험하는 모든 것을 명료한 자각과 현존을 향상시키는 요인으로서 활용하게끔 마음을 훈련시켜 유연성을 더욱 강화한다. 업에서 기인한 반응이 적어지면 긍정적 행동을 선택하기가 쉬워진다.
우리가 깨어 있는 동안 알아차림을 경험 속에서 안정시키고 행동 속에서 강화시킨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꿈속에서도 작용하기 시작한다. 주요수행은 잠들기 전,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는 세 번의 주기 중에 이루어진다.
깨어 있을 때 함양되었던 명료한 자각과 현존이 꿈속으로 옮겨가듯이, 꿈속에서 함양된 명료한 자각과 현존은 죽음으로 옮겨간다. 경험 속의 즉각적인 알아차림, 반응(행동) 속의 알아차림, 꿈속의 알아차림, 그리고 죽음 이후의 알아차림 이것이 수행의 바른 순서이다.
네 가지 기본 수행
1. 하루를 보내며 삶의 본질이 꿈과 같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연습.(이 알아차림이 꿈에서도 똑같이 나타날 때까지) 이렇게 삶의 모든 것을 꿈으로 보는 것이 첫 번째 준비이다. 이것은 뭔가를 인식하는 순간에 적용되어야 하며 어떤 반응이 일어나기 전에 적용되어야 한다. 이것은 그 자체로도 강력한 수행이 되며 수행자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준다.
2. 어떤 상황이나 대상에 대한 대응 속에서 집착이나 혐오가 일어나자마자 이것이 모두 꿈이라는 것을 상기하기. 수행이 진전되면 대상과 상황들이 더 명확하고 생생하게 경험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그저 찰나이자 공허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이것을 통해 일어나는 현상의 가치가 단지 상대적일 뿐이라는 것이 부각되고 좋고 싫음에 기초한 분별과 혐오가 줄어든다.
3. 잠들 준비를 하며 하루 동안의 기억을 떠올리며 마음에 인식되는 것이 어떤 것이든 모두 꿈으로 인식하기. 그리고 꿈을 꿀 때 그것이 정말로 무엇인지 알아차리겠다는 강한 결심을 세우라. 잠드기 전, 마음을 되도록 많이 정화하라. 당신이 아는 기법이 무엇이든, 당신 자신을 이런 감정들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그 기법을 활용하라.
4. 잠에서 깨어나 일어났을 때 꿈을 기억하기. 꿈을 꾸었는가? 꿈속에서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는가? 자각몽을 꾸었다면 성취의 기쁨을 만끽해도 좋다. 수행에 대한 행복감을 발전시키라. 훗날에도 계속 명료한 자각을 계발하겠다고 다짐하라. 그리고 당신의 그 의도마저도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라.
삶을 선명하고 강렬한 꿈과 같은 것으로 경험할수록 당신의 의식은 더 확장되고, 밝아지고, 명확해질 것이다. 꿈속에서, 그리고 깨어 있는 삶에서 명료한 자각이 계발되면 삶을 긍정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훨씬 더 큰 자유가 생긴다. 또, 마침내 좋고 싫음과 이원성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게 되고 비이원적 현존에 거할 수 있게 된다.
꿈 요가의 주요 수행
1. 의식을 중앙 채널로 가져오기
남자는 오른쪽으로, 여자는 왼쪽으로 눕는다. 몸을 안정시키기 위해 무릎을 충분히 구부리라. 위쪽 팔은 몸 옆면에 두고 아래쪽 손은 뺨 아래에 두라. 살짝 높은 베개를 사용하면 얕은 잠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부드럽게 호흡하고 몸을 이완하라. 숨이 충분히 들어오고 나가면서도 아주 고요하여 숨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도록 하라.
목 차크라 안에 네 개의 꽃잎을 가진, 아름답고 붉은 연꽃이 있다고 심상화하라. 네 개의 꽃잎 중심에 빛나는 티베트 음절 '아'자가 반듯하게 있다. 각각의 꽃잎에도 음절이 있다. 앞쪽은 롸(RA), 왼쪽은 라(LA), 뒤쪽은 샤(SHA), 오른쪽은 사(SA)이다. 잠이 오면 이완되고 가벼운 상태를 유지하면서 이 '아'자에 집중하라.
2. 명확한 시각과 경험을 함양(명료함 증진)
약 두 시간 동안 자고 난 뒤에 일어나 두 번째 수행을 시작한다. 전통적으로 이 수행은 자정쯤에 해야 하지만 당신의 삶에 맞춰 수행을 조정하라. 첫 번째 수행과 같은 자세를 취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특정 호흡을 해야 한다. 숨을 들이쉬고 그 숨을 아주 부드럽게 참고 있으라. 골반 기저부 근육인 회음을 가볍게 조여서, 참고 있던 숨이 위쪽으로 당겨지는 느낌이 들게 하라. 배꼽 바로 아래에 멈춰 있는 숨이 그보다 더 아래쪽의 압력으로 인해 압축되는 것을 경험해보라. 잠깐 숨을 참은 후에는 부드럽게 숨을 내쉬라. 숨을 내쉬는 동안에는 골반, 가슴, 온몸의 근육들을 이완하라. 이것을 일곱번 반복하라.
집중해야 할 지점은 양미간보다 살짝 위의 높이에 머리 안쪽에 있는 차크라다. 차크라 안에서 하얗게 빛을 발하는 빛의 공을 심상화하라. 그리고 오직 명료함, 광명만이 남을 때까지 그것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라. 이 상태에서 잠이 든다면 알아차림이 지속될 것이다.
3. 헤매지 않도록 힘을 기른다.(현존 강화하기)
두 번째 수행이 끝나고 대략 두 시간 후에 시작하라. 전통적으로는 이 시간을 동트기 두 시간 전으로 보고 있다.
높은 베개에 기대어 누우라. 다리를 느슨하게 교차하라. 높은 베개를 사용하면 얕은 잠을 유지할 수 있고 꿈속 명료함이 더 커진다. 호흡을 완전히 알아차리면서 21번의 깊고 부드러운 호흡을 하라. 이때 가슴 내부의 검은색으로 빛나는 훙(HUNG) 음절을 시각화하면서 가슴 차크라에 집중하라. 검은색 '훙' 안에서 마음이 가볍게 쉴 수 있도록 놔두고 잠들라.
4. 용맹함 계발하기
특정 자세와 정해진 호흡법이 없이 그냥 편안한 자세로 자연스럽게 호흡하라. 전통적으로 새벽 동이 트기 바로 전, 마지막으로 깬 이후 우 시간이 지난 시점이다.
성기 뒤쪽의 차크라인 '비밀 차크라'에 의식을 집중하라. 그 차크라 안에는 검게 빛나는 빛의 구가 있다. 이 검은 빛과 하나가 되어라. 마음을 편히 하고 모든 곳에 있는 광채를 발하는 검은 빛에 가볍게 집중하라. 이제 잠들라.
여기까지 마쳤으면 더 이상 수행을 위해 깨어날 필요는 없다. 물론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일어나긴 해야겠지만 말이다. 일어날 때도 현존 속에서 깨어나도록 하라. 깨어난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면서 말이다. 이 수행의 목적은 밤 동안에 알아차림의 지속성을 키워 깨어났을 때와 잠들었을 때, 그리고 종일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다.
수행은 항상 순서대로 진행되어야 하고, 수면 시간을 정확히 두 시간씩 나눌 필요까진 없지만, 원한다면 알람을 사용해도 된다. 중요한 점은 잠에서 총 3번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수행이 복잡해보여서 용기를 잃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처음에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꿈 요가에 숙달될수록 수행은 더욱 단순해질 것이다. 알아차림이 안정되면 다른 어떤 종류의 수행도 필요 없어진다. 이때는 그저 현존에 머무는 것으로 충분하며 꿈은 자연스럽게 자각된다. 한번 자각이 안정되면 어떤 수행이든지 꿈속에서 행할 수 있다. 꿈 속에서의 수행은 깨어있는 동안 하는 수행보다 더 효과적이며, 더 많은 결과를 낸다.
수행자들은 시각화를 유지하기가 어렵다거나 그것이 잠을 방해한다고 말하곤 한다. 수행 순서에 대한 이해가 이 문제를 명확히 해줄 것이다. 바른 순서는 보는 것, 느끼는 것, 그리고 그것 자체가 되는 것이다. 당신이 대상과 온전히 하나되면 심상화가 중단될 수 있는데 그래도 괜찮다.
융통성 없는 마음, 즉 지혜가 가려지고 편협한 경험만을 하여 생겨난 잘못된 관점의 제한들은 우리를 환상에 불과한 자기 정체성에 계속 걸려들게 하며 자유를 찾지 못하게 막는다. 영적인 길에서 진척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집착과 혐오를 줄여야 한다. 집착과 혐오의 기반에 깔려 있는 무지를 꿰뚫고 그것 뒤에 있는 지혜를 발견할 때까지 말이다. 마음의 유연성이 계발되면 집착과 혐오를 극복할 능력이 생긴다. 마음의 유연성은 우리가 무언가를 새로운 방식으로 볼 수 있게 해주며 습관적인 반응에 맹목적으로 끌려다니지 않고 더 긍정적으로 반응하도록 돕는다.
자각몽 속에서 무엇이 나타나든 간에, 우리는 그것을 변화시키는 수행을 한다. 꿈에서는 경험의 한계가 없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 일어나게 할 수 있다. 우리가 경험의 습관적인 한계를 깨면 마음은 점점 더 유연해지기 시작한다. 우리가 경험의 습관적 한계들이 지닌 상대성과 가변성을 경험하게 되면, 습관적인 인식에 의해 생겼던 편협함도 적어진다. 꿈과 같은, 가변적인 경험의 본질에 대한 경험을 통해 우리는 우울을 행복으로, 두려움을 용기로, 분노를 사랑으로, 절망을 믿음으로, 산란함을 현존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유익하지 않은 것을 유익한 것으로 바꿀 수 있다. 이러한 수행들의 목적은 자각과 유연성을 삶의 모든 순간에 통합시키는 것이다. 또, 우리가 현실을 규정짓는 방식이나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 망상 속에 잡혀 있는 방식 등등 강하게 조건화된 방식들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꿈을 활용하면 부정성을 감소시키고 긍정성을 증가시켜 우리가 세상 속에 존재하는 방식, 즉 우리의 습관적인 방식들을 바꿀 수 있다. 이것은 일상 속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기술들을 알려줄 뿐 아니라 영적 삶의 가장 심오한 수준에도 적용될 수 있다. 당신의 삶에서 성취할 수 없었던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꿈에서 성취할 수 있다. 꿈에서 느끼는 성취감은 깨어 있는 때에도 영향을 미친다. 경험을 바꿔나가면 업의 흔적도 바꾸게 된다. 꿈을 활용하여 당신에게 중요한 것을 성취하라. 또는 다른 나라 혹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땅으로 여행을 떠날 수도 있다. 아니면 다른 행성이나 수년 동안 가보지 못했던 장소 혹은 심해를 여행할 수도 있다.
마음속 경계를 허무는 것은 우리를 마음의 근원인 자유로 이끈다. 지구의 중심, 다른 행성, 세계 등 당신이 가고 싶었던 곳 어디든 여행을 떠나보라. 꿈의 가능성에는 한계가 없으므로 우리는 꿈속에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긍정적인 쪽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 여정에서 가장 도움이 될 지시 사항이다. 꿈에서의 행동은 깨어 있는 삶에서의 행동처럼 우리의 내면에 영향을 준다. 꿈에서는 굉장한 자유가 있지만 이원성에서 벗어날 때까지는 업의 원인과 결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부정적 업의 지시를 타도하는데 필요한 유연성을 계발하려면 인내심과 강한 의도가 필요하다. 꿈의 모든 경험을 깨어 있는 삶처럼 영적 여정에 포함시키라. 한계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데 꿈을 활용하라. 당신의 영적 여정에서 나타난 장애물들을 극복하는 데 꿈을 활용하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신의 진정한 본성, 모든 현상의 진정한 본성을 인식하는 데 꿈을 활용하라. 이것이 꿈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를 방해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무지뿐이다. 하룻밤의 노력으로 깨달음을 얻는 수행은 어디에도 없다. 영적 성숙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영적 성숙은 죽을 때까지 이어질 평범한 삶의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시간과 싸우면 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법을 알게 되면 수행은 그것 자신에 의해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신체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을 활용하여 현존으로 돌아가고, 세상의 아름다움과 연결되고, 우리의 산란 기저에 깔린 생생하고 영양가 있는 삶의 경험과 연결되라. 이것이 성공적인 꿈 요가를 뒷받침해준다.
잠 수행과 꿈 수행의 차이는 잠 요가가 순수하고 비이원적인 알아차림인 신의 마음을 계발하는 것에 반해, 꿈 요가는 여전히 주체와 객체의 영역에 남아 있다. 수행의 초기에는 반드시 마음이 붙잡을 무언가가 제공되어야 한다. 잠 수행은 사실 형태가 없기 때문에 집중할 대상도 없다. 꿈속에는 마음이 붙잡을 것들이 있지만, 여기에는 마음이 붙잡을 그 어떤 대상도 없다. 이러한 점 때문에 잠 요가는 꿈 요가보다 훨씬 어려운 것으로 여겨진다.
잠 수행의 준비수행
밤 동안에서 촛불이나 약한 불빛을 켜두고 자면 마음을 약간 각성된 상태로 유지할 수 있다. 물질계에서 빛의 경험과 관련되는 것은 수행에 도움이 된다.
잠 수행
네 번의 잠 수행은 꿈 수행과 마찬가지로 잠에서 깬 밤중에 진행하라. 차이점은 잠 요가는 네 번의 수행 모두 똑같은 수행이다.
꿈 수행의 남자는 오른쪽, 여자는 왼쪽으로 눕는다. 가슴 중앙에 파란 연꽃잎 네 장이 있다고 심상화하라. 가슴 중앙에는 순수한 빛으로 된 맑은 공(살제 뒤 달마?)이 있다. 무지의 잠이 아닌, 청정한 빛의 잠을 자게 해달라고 다키니들에게 기도하라. 기도는 헌신과 의도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감각 경험이 서서히 중단되는 과정에 따라 명확한 경계가 없이 부드럽게 움직여간다. 순서는 시각경험(앞쪽 노란 빛) -> 시각 경험의 감소(왼쪽 초록 빛) -> 시각 경험의 쇠퇴(뒤쪽 빨간 빛) -> 시각 경험의 중단(감각 경험이 거의 없어질 때쯤 오른쪽 파란 빛) -> 시각 경험의 부재(완전히 잠속에 들어가는 시점에 중앙의 희끄무레한 파란 빛)
꿈 수행과 마찬가지로, 밤중에 대략 두 시간 간격마다 세 번 일어날 수 있다면 가장 좋다.
수행자는 덩굴과 같아서, 의지할 것이 있는 곳에서만 자랄 수 있다. 외적인 환경은 삶의 질에 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니 자연환경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수행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보다는 수행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과 지내라. 진리에 관한 책을 읽는 것, 다른 사람들과 명상 수행하는 것, 법문을 듣는 것, 다른 수행자들과 어울리는 것도 도움이 된다.
우리가 자는 동안 청정한 빛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이 꾸며낸 것들에 습관적으로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인해 우리의 깨어 있는 삶 역시 산란하고, 꿈 같으며, 불명확하다. 우리는 자연 그대로인 비이원적 릭빠를 경험하지 못하고 공상과 정신적 투사의 경험에 갇힌 채 남아 있다.
수행에 한계가 되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창조한 것들뿐이다. 수행을 명상, 꿈, 잠 등의 주기들로 구분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잠잘 때든 깨어 있을 때든 상관없이 모든 순간에 완전히 릭빠에 머물러야만 한다. 이렇게 될 때까지 수행은 모든 순간에 적용되어야 한다.
움직이는 마음을 초월하고 마음의 본성을 직접 알기 위해서는 수행이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축적해온 모든 가르침들이 짐스럽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이런 느낌은 수행의 길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가르침을 받고 끊임없이 배우라. 그러나 그것들을 충분히, 깊이 이해하여 그것들로부터 실질적인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일단 한 번 당신이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게 된 가르침은 더 이상 의무가 아니게 된다.가르침은 자유를 향한 길이고,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기쁨도 느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수행에 발목이 잡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약 성과 없는 수행을 계속하고 있다면, 그리고 삶에 긍정적인 변화가 아무것도 없었다면 수행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해도 하지 못한 채로 단순히 어떤 동작을 한다고 해서 당신이 수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은 무엇이 본질이며 그것을 어떻게 적용하는지 알아내고 이해함으로써 수행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수행은 당신을 위해 있는 것이지, 당신이 수행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위대한 대사들도 잠 요가의 성취를 위한 꾸준한 수행을 하는 데 긴 시간이 걸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한 번, 혹은 백 번 시도했는데도 아무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고 실망하지 말라. 수행을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유익이 따른다. 당신의 삶 속에 더 많은 알아차림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유익한 것이다. 목표를 실현하려면 길고 꾸준한 의도와 수행이 따라야 한다. 스스로 낙담하게끔 놔두지 말라. 당신의 온 존재를 수행으로 끌어오라. 강한 의도와 기꺼운 노력이 따른다면 당신은 분명히 자신의 삶이 긍정적으로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틀림없이 수행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반응형'나의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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