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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서재 2024. 6. 15. 16:24

     

    1780년(종조4) 종형인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 고종의 칠순연에 가는 길에 적은 기행문집으로 26권 10책 중 일부분만 실은 책이다.

    시간 순으로 기록되어 지루하지 않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엿 볼수 있어서 좋았다.

    수레 제도와 종마의 중요성, 보고 배운 것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것을 중요시하는 실학자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글을 짓고 다과를 하며 밤늦게까지 그 곳의 상인들과 어울려 담화를 나누고

    낙타를 보고 싶어했으나 잠자느라 구경못해 아쉬워하고

    되놈들은 술을 데펴 은행알같은 작은 술잔에 차분히 마시는데, 연암은 큰 술잔을 데우지도 않고 호쾌하게 큰 잔에 부어 단숨에 마시는 것을 보고 놀라는 되놈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풍류와 술을 무지 좋아했었나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술배는 너무나 커서 큰 사발에 술을 따라 이마를 찌푸리며 한꺼번에 마시곤 한다. 이는 무작정 술을 뱃속에 붓는 것이지 취미를 돋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한 번 술을 마셨다 하면 반드시 취하게 마련이고 또 취하면 주정을 하게 되고 주정하다 격투가 시작되며 끝내 술집 항아리, 사발 등을 다 깨뜨리고마는 것이다. 이런 지경에 이르면 풍류, 문아의 모임이라는 참된 취지는 완전히 무시되는 것이다. 지금 압록강 동쪽 술집들에서는 하룻밤이 멀다 하고 값진 그릇과 보배로운 공동을 두들겨 깨고, 아름다운 화초를 꺾고 밟는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그 실례 하나를 들어보면, 내 친구 이주민은 풍류, 문아를 지닌 선비로서 한평생 중국을 기갈들린 듯 연모했는데 술 마심에 있어서만은 중국의 예법을 기뻐하지 않아 술잔의 대소와 술의 청탁을 헤아리지 않고, 손에 닿기 바쁘게 입을 벌리고 한꺼번에 들이붓는다. 친구들은 그것을 '술 엎음'이라 했다. 이번 길에 그와 함께 참여하기로 했으나 어떤 이가 '그는 주정을 부려 가까이 할 수 없겠다'고 고자질하였다. 그러나 내가 그와 10년 동안이나 마셨으나 얼굴에 단풍 빛이 오른 적이나 입에 게거품을 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마실수록 더욱 얌전해졌다. 다만 그의 '술 엎음'에 결점이 있을 따름이었다. 이주민은 늘 "옛날 두보도 술을 엎었다오. 그의 시에 '아이야, 이리 오너라. 손에 든 술잔을 엎으련다'라는 구절이 있으니 그건 입을 벌리고 누워 아이들로 하여금 술을 입에다 엎는 게 아니겠어?" 하고 증거를 댄다. 그 말에 옆에 있던 사람들이 허리를 꺾곤 했다. 지금 만리 타향에서 문득 친구와의 옛일이 떠오른다. 알 수 없지만 이주민이 오늘 이 시간에 어느 술집에 앉아 왼손에 술잔을 들고 오른손으로 따르면서 이 만리 타향에서 노니는 나를 생각하고 있을는지."

     

    그리고 당시 우리나라 청심환이 인기가 있었나보다.

     

    연암은 적극적으로 벼슬길에 나서지는 않았다. 1765년에 한 번 과거에 응시해 낙방한 후 다시는 시험에 뜻을 두지 않았다. 당쟁으로 얼룩져 있던 당시 조선의 분위기와 세도가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그는 고래의 전통을 답습하는 유교학문보다 이용후생을 꾀하는 새로운 학문에 열중했으며, 입신양명에는 별다른 뜻을 품지 않았다. 그러나 풍요로운 정신세계와 실사구시의 학문을 추구했으면서도 벼슬도 경제적 기반도 없었던 연암의 생활은 언제나 궁핍할 수 밖에 없었다. 가족들은 광주로 내려보내고 홀로 지내면서 그는 상황이 닿는대로 격의 없이 살았다. 사흘간 밥을 굶는가하면, 사흘동안 술만 마시기도 했으며, 며칠간 책만 읽기도 했다. 그러다가 주변의 문사들이 찾아오면 시와 문장에 대해 논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현실의 모순을 지적하고 사회 개혁을 논하느라 밤을 새기도 했다. 정조 등극 초기, 세도를 휘두르던 홍국영에게 벽파(영조 때 사도 세자를 무고하여 비방한 당파)로 몰리게 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가족들과 함께 황해도 금천 연암 골짜기로 이주했다. 그의 호는 바로 이곳의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이곳에서 연암은 양반의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직접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홍국영이 실각하자 연암은 다시 한성으로 돌아왔다. 44세이던 1780년 삼종 형인 영조의 부마 금성위 박명원이 청나라 건륭제 고종의 칠순을 축하하는 진하사절로 선발되었고, 박명원으 권유로 그는 군관의 직함으로 사절을 따라나서게 되었다. 음력 5.25 한양을 떠난 사절단은 10.27 돌아왔고, 이후 3년동안 공을 들여 <열하일기>를 정리해 세상에 내놓았다.

    이후 그가 맡은 관직들은 거의 외직이었고 이권이 오가는 벼슬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중상주의를 추구했지만 평생 '사대부는 물질로써 사람을 기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지키며 살았다. 그는 공무를 집행함에 있어 강직하고 청렴했다.

    연암의 사상에서 주목할 점은 토지개혁법인 '한전법'을 주장한 것이다. 한전법은 일종의 토지 소유 상한제로 일정 한도 이상의 토지 소유를 금지하고 토지를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생산을 최대화하여 보다 고른 분배를 실현하자는 방안이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허생전', '양반전', '민옹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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