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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법성경을 배우는 공간 2020. 5. 6. 19:52반응형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일상생활 중에서 성령의 인도함을 확인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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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KBS성경공부자료. 2006. 10. 21.>
Ⅰ. 서론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가장 궁금하기도 하고 또한 가장 어렵기도 한 것은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학교 선택, 배우자 선택, 직장 선택, 이사나 가족 계획, 장래 희망 등과 같이 우리의 생활 속에 아주 가까이 있는 이런 내용들을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결정하고 나가야 하는데 정작 이런 결정을 내리는데 있어서 그렇게 쉽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뜻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내 자신의 생각인 것 같은 혼란 속에서 어떻게 결정을 내려야 할지를 몰라서 망설인 적이 한 두 번이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혼란스럽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쉽게 신비주의적인 방식으로 기도나 환상 중에 자신이 내려야 할 결정과 관련해서 무엇을 보았다던가, 아니면 들은 내용으로 자신의 결정을 내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매우 무책임한 행동이며, 또한 합리적으로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보지도 않고 미신적으로 무조건 결정하는 행동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결과는 매우 극단적이고 비이성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이런 모습과 관련해서 요즘 모 선교단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이란 제목으로 이와 같은 주제를 제시하기도 하는 데 전형적인 신비주의의 형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신비주의 형태를 비판하면서 극단적으로 인간의 이성에만 의지해서 모든 것을 자신의 생각과 의지대로만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도 역시 문제가 됩니다. 역사적 개혁신앙에서는 이런 신비주의적인 형태와 극단적인 이성의 판단 형태 모두를 철저히 배격하고 오직 성경에서 가르쳐 주신 바른 내용만을 간직해 왔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비주의적인 방식도 또한 극단적인 인간의 이성적 판단만을 의지하는 것도 모두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선조들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관련해서 사소한 것이나 또는 중요한 결정들을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쫓아서 판단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Ⅱ. 본론
먼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 주제와 관련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생활의 모든 내용들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서 잘 분별(판단, 확인, 분석, 연구)해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신비주의처럼 어떤 꿈이나 환상 등을 통해서 즉흥적이고, 미신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깊은 생각과 판단과 세밀한 연구가 필요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런 명령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라는 말씀에 잘 제시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분별"이라는 단어는 즉흥적이고 단순하고 미신적인 판단이 아니라 위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깊은 주의를 가지고 세밀히 연구해서 살펴야 하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주제를 잘 배우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서 하나님의 자리와 인간의 자리에 대해서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교리에서 이 주제가 설명이 되기 때문에 이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 주제도 역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자리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해야 할 모든 일상생활의 내용들은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잠29:26)라는 말씀처럼 철저하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이미 작정되어 있는 것들임을 먼저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있을 모든 일을 영원한 때부터 그 자신이 뜻하신 바,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계획에 의하여 자유롭게, 그리고 변치 않게 작정해 놓으셨다(3장1절).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작정하신 것처럼, 그는 그의 영원하고 가장 자유로운 뜻과 의사(意思)에 의하여, 그것을 위한 모든 방법들을 미리 정하셨다(3장6절).
만물의 위대한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과 그들의 언행심사를 보존하시고, 감독하시고, 처리하시고, 통치하시되,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하시며, 그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섭리에 의하여, 그의 무오한 예지(豫知)와 그 자신의 의지의 자유롭고 불변하는 작정을 따라서 하신다. 이로써 그의 지혜, 능력, 공의, 선하심, 그리고 자비의 영광을 찬미케 하신다(5장1절)
하나님은 그의 일반적 섭리에서는 여러 수단들을 사용하신다. 그렇지만 그는 그 수단들 없이 그것들에 초월, 그리고 역행하여서도 그의 기쁘신 뜻대로 자유롭게 역사하신다(5장3절).
그 섭리는 아담의 첫 번째 타락과, 천사들과 사람들의 모든 죄까지도 포함한다. 그런데 그러한 죄들은 단순한 허용에 의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은 여러 세대에 가장 지혜롭고 강력하게 제한하시고, 그 밖에도 명하시고 주관하시어 그 자신의 거룩한 뜻들을 이루도록 하신다(5장4절).
위의 내용들을 보게 되면 우리들이 겪게 되는 모든 사건들이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가운데 계획된 대로 이루어져 가는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이미 영원 전에 계획하시고 또한 그 계획하신 대로 완전히 성취하실 것임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여기서 계획된 목표뿐만 아니라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들까지 모두 하나님께서 작성하신 대로 되어져 가는 것임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46:10),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전3:14)라는 말씀을 따라서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 가운데서 결정해야 할 많은 일들이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하신 대로 되어져 가게 되어 있음을 철저하게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이 고백은 반대로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는 그 어떤 계획과 일의 내용을 결정할 수도 없고 또한 성취할 수도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인가 원하는 대로 계획할 수 있고, 또한 성취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며 결정하지만 개혁신앙은 출발하는 출발점 자체가 이미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만사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작정하시고 계획하신 대로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서 완전하게 성취되어질 것이라고 고백하며 시작할 때는 어떤 일을 생각하고 또한 계획하고 결정하는데 있어서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정신이 기초된 형태의 모습을 칼빈은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계획을 세울 때 자신의 의견대로 하지 아니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정당한 목표로 향하게 되도록 하나님의 지혜에 자신을 복종시킨다. 그러나 그는 외부의 원조가 있으면 그것으로 안심하거나 또는 그것이 없다고 해서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두려워 떨 정도로 외부적인 원조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의 섭리만을 굳게 신뢰하고 있으며, 또한 현재의 일에 몰두한다고 해서 섭리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떨쳐 버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강요1. 17. 9).
이제 이런 기초에서 출발하게 될 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작정하신 대로 일이 이루어진다면 인간은 아무 일도 계획할 필요도 없고 또한 할 필요도 없이 그냥 놀기만 하면 되겠네요". 그러나 성경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는 이처럼 인간의 자리를 무책임한 자로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는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아담을 기계와 같은 존재로 만드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담에게 선과 악을 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셔서 인간의 자리를 아주 책임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에게 자유로운 판단력을 주셨을지라도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통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를 떠나 있지 않도록 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신비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인간은 인격적인 자유로움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이런 내용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다음과 같이 정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아니시며, 피조물들의 의지를 침해하시는 이도 아니시다.
제 2원인들의 자유나 우발성을 제거시키지 않고, 오히려 확립하시는 분이시다(3장1절).
제 1 원인되시는 하나님의 예지와 작정에 따라, 모든 일들이 변함이나 틀림이 없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동일한 섭리에 의해서, 하나님은 제 2 원인들의 성질에 따라 그 모든 일들이 필연적으로, 자유롭게 또는 우발적으로 일어나도록 작정해 두셨다(5장2절).
그러나 죄악성은 오직 피조물에게서 나온 것이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가장 거룩하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죄의 조성자이거나 승인자가 아니시며 또한 그러실 리도 없다(5장4절).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의 신비로운 자리가 잘 제시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기계처럼 억압하시지 않고 오히려 인간들이 자유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작정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하나님을 떠나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를 벗어나지 않는 형태로의 자유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또는 반드시 필요해서, 때론 아주 우연적으로 일들을 계획하고 결정해 가지만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인간은 그렇게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형태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인지 모두 소개할 수 없지만 성경에서는 이런 형태가 인간에게 가장 좋은 형태임을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우리는 우리가 만나게 되는 모든 일상생활을 마치 내 자신의 계획과 힘으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작정하심을 따라서 되어져 감을 고백하고 매 순간 순간마다 조심스럽게 또한 주의 깊은 생각을 가지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 때 그것이 내가 생각했던 대로 되어지지 않고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도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생각하면서 내 생각대로는 되어지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져 감을 신뢰하고 용기를 얻게 해 줍니다. 여기에는 우리 자신의 실수로 오게 되는 죄악조차도 이런 정신 안에서 생각하게 될 때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원하는 방식으로 또는 필연적으로, 또는 우연히 계획하고2) 결정을 내리는 형태로 살아가도록 작정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게으름과 나태함을 버리고 더욱 열심을 내어 하나님께서 주신 일상생활의 내용들을 잘 살펴서 계획하고 결정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정신이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9:10) 라는 말씀에도 잘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성도들이 어떤 일을 결정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서 맞는 것이라면 원하는 대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과 결혼을 하고 싶은 데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고 또한 그를 너무나 사랑한다면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그 일을 진정으로 원하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으로는 필연적으로 되어지는 일도 있는데 예를 들면 학생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싫어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일상생활은 어떤 규칙이 있어서 반드시 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연적으로 되어지는 일이 있습니다. 즉 자신의 계획과 판단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전혀 우연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때도 그 일을 잘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서 인간이 자유로움을(원함과, 필연적으로, 우연히)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2-13)3) 라는 말씀에 잘 제시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정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 소원을 두게 하시는 방향으로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소원에 대해 사려분별을 가지고 두렵고 떨림으로 주의 깊은 판단과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참고:에스겔 36:36-37/ 예정론 속에서 인간의 기도 형태).
이제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아래서, 스스로 원함으로, 또는 필연적으로, 또는 우연히 일을 계획하고 결정하게 되는 데 무슨 기준으로 그것을 판단하느냐? 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제시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기준에 의해서 우리가 일상생활 가운데 만나게 되는 일들을 위의 3가지 형태로 결정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부딪치는 모든 문제들은 성경에서 설명하고 있고 또한 그 성경으로 충분한 답을 얻을 수 있다고 우리는 성경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기 때문에 이 모든 문제에 대한 기준을 성경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 부딪치는 문제들에 대해서 성경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혹 "누군가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가?, 어떤 직장을 가야 하는가?, 어떤 학교를 가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는 성경에 없지 않느냐?"라고 말하면서 성경만으로 불충분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을 알지 못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비록 성경에는 우리가 누구와 결혼하고, 어떤 직장을 선택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지시되어 있지는 않아도 여기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원리를 충분히 제시해 놓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만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이 개혁교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책들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으로, 신앙과 생활의 법칙이 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2절).
최고의 재판관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외에는 다른 아무도 될 수 없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10절).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그들 안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창조함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를 통하여, 그의 말씀과 그들 안에 내주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제적으로 또는 인격적으로 더욱 거룩해 진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3장 1절).
성경과 더불어 또한 성경을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확증을 주시는 하나님의 영만이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려 주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5문).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가르침을 확증시키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영광을 높이기 위한 생활을 규정해 나가도록 율법과 선지자들에게서 얻은 그 모든 증거들을 여전히 사용하는 바이다(벨직신앙고백서25장).
제 123문 :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께 더욱 더 순종할 수 있도록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려 달라는 것입니다(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이처럼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경과 더불어 또한 성경을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인도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만이 우리의 신앙과 생활, 특히 생활과 관련되어 결정해야 할 모든 내용들을 이끌어 가시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성경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관련되어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제시해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다시 3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3가지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6절에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 신앙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하여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모든 계획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거나, 아니면 선하고 적절한 추론에 의하여 성경에서 이끌어지게 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이 성경에다 성령의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든지 혹은 인간들의 전통에 의해서든지 아무 것도 어느 때를 막론하고 더 첨가할 수가 없다. 그러나 말씀으로 계시되어 있는 그러한 것들을 구원론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하나님의 성령의 내적 조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교회의 정치에 관하여는, 인간적인 활동이나 단체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어떤 격식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러한 격식들은 반드시 준수되어야 하는 말씀의 일반적인 법칙들을 따라서, 또한 본성의 빛과 기독교인의 신중한 사려 분별에 의하여 정해져야 하는 것이다.
첫째는 성경에 명백하고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는 규칙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는 성경에 단어적으로는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성경을 읽으면 당연한 결과로 제시되는 규칙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믿는 자와만 결혼해야 한다는 것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셋째로는 "아디아포라"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즉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양심의 자유에 맡겨진 일들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전체 정신에 의해서 성도들의 이성적인 판단으로 신중한 사려 분별을 가지고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술과 담배에 대한 결정 같은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가 부딪치게 되는 많은 일상생활에 대한 판단과 결정은 3가지의 성경 이해 형태를 가지고 그 기준을 마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우리의 생활에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을 "신율주의적 삶", "삶의 규범으로 율법의 사용"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음으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의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부분이 가장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며, 또한 이 주제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고 또한 실제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제시했던 내용을 반드시 기초로 해야 이 내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를 이해하고 또한 성경이 삶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 등이 먼저 전제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내용은 신비주의에서 말하는 성령의 인도 형태로 변질되어 오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부터 어떤 유익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기억해야 한다. --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그의 영에게서 기대할 것은 그가 가르치는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의 마음을 비춰주시는 것뿐이라고 언급하신다. --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자랑하지만, 자기 생각을 말하는 사람이 성령을 운운하는 것은 거짓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과는 관계없이 성령의 이름만으로 제시되는 것은 일체 믿지 말아야 한다. -- 성령께서는 끊을 수 없는 유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결합되기를 원하시며, 그리스도께서도 교회에 성령을 약속하실 때에 이 점을 확언하셨고, 교회가 항상 이 신중한 태도를 계속하기를 원하신다. 이제 하나님과 성령이 주신 이 신성 불가침의 명령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의 원수들은 말씀과는 별도로 성령이 교회를 지배하시는 것 같이 말한다(강요4. 8. 13).
결국 성령의 인도하심이라는 것은 성경과 분리되어 역사 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철저하게 성경과 연합하여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깨우쳐 주시고 또한 그 일을 할 수 있는 힘도 주셔서 이루시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성도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모든 판단과 결정의 내용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 안에서 작정된 대로 이루어져 갈 수 있도록 인도해 가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7-28)라고 증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제시된 3가지 형태로(명확히, 추론, 사려분별) 성령께서 성도에게 그 뜻을 밝혀 주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1:13)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구조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구체적인 인도하심을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출35:31-36:2)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케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
(대하18:31) 돌이켜 저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매 여호와께서 저를 도우시며 하나님이 저희를 감동시키사 저를 떠나가게 하신지라
(대하21:16)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과 구스에서 가까운 아라비아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사 여호람을 치게 하셨으므로
(학1:14) 모든 백성의 마음을 흥분(일으킴)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역사를 하였으니
(롬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롬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롬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고전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고후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후6: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갈5:16-17)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엡3:16)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위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성령의 인도하심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성도들의 마음과 연관된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가운데 이루시고자 하시는 내용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을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자원하거나, 필요해서, 또는 아주 우연적으로 일어나는 형태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기도하는 가운데 풍성하게 일어나기도 하며 또한 일상 중에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하심 가운데로 이끌려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중하게 우리의 마음을 살피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신중하게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과 관련된 성령의 인도하심을 어떤 외부적인 현상으로 나타내거나 또는 보여지는 어떤 내용을 가지고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하면 그것은 잘못된 판단인 것입니다. 비록 성령의 인도하심이 온 우주 만물에 역사하기 때문에 우리의 외부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가는 내용이 있을지라도 이것을 깨닫고 확인하는 과정은 철저하게 성도의 마음과 관련된 문제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생각과 마음과 심령 속에서 주의 깊게 계획하고 판단하고 결정할 문제이지 어떤 외부적인 신기한 현상이나,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단순하게, 미신적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지하는 것은 극단적인 자신의 이성적 판단만을 의지하는 것도 역시 반대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의 기준에 의해서 우리 마음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결정하는 것이지 단지 자신의 이성적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더 주의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성경을 기록하던 당시의 성령의 영감과 오늘날 성령의 감화(조명, 비추심, 인도하심)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면 극단적인 신비주의로 치달을 수밖에 없음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즉 성령의 영감은 성경을 기록하게 했던 자들에게만 한정적으로 허락하신 것이며 일반적인 모든 성도들이 은혜를 입는 방식은 성령의 감화 형태인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성도의 모든 일상생활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성취해 가는 방향으로 그리고 그 기준은 오직 말씀이며, 특히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3가지 형태의 모습을 가지고 행하시는 데 그 구체적인 행하심은 위에서 이미 소개되었던 것처럼 인간이 자원해서 스스로 하는 방식과 또한 필연적으로 할 수밖에 없도록, 또는 자신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아주 우연히 되어지는 형태로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행동을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일들이 있을 때 먼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마음 속에 인식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행동이 이 기준에 의해서 판단하고 결정되어 질 수 있도록 성령의 인도하심을 바라며 기도하면서 신중하게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Ⅲ.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우리의 일상생활과 관련되어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원리가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이 원리에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끊임없이 간구해야 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일평생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정신이 웨스트민스터에는 다음과 같이 고백되어지고 있기도 합니다. "참된 신자일지라도 이 확신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기다리고 많은 난관들과 더불어 싸워야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께로부터 그에게 은혜로 주어진 것들을 그가 성령을 통하여 알 수 있기 때문에, 이상한 특별계시 없이도, 보통 방편들을(말씀, 성례, 기도)을 올바르게 사용함으로써 그 확신에 도달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에게는 자기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확신하는 자리에 이르도록 힘쓰는 것은 모든 믿는 자의 의무인 것이다"(18장 3절).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 가는 일을 쉬지 말고 계속 노력해 가야 할 것입니다.
미주
1) (렘10:23)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 하니이다
2) (전9:11)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왕상22:3)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3) (잠16: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잠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잠20:24)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잠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계17:17)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신26:17) 네가 오늘날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행하고 그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 소리를 들으리라 확언하였고 (신26:18)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자기의 보배로운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또 그 모든 명령을 지키게 하리라 확언하셨은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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