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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리는 성경에 있다.
    성경을 배우는 공간 2020. 6. 14. 07:44

     

    존 맥아더의 성경, 이렇게 믿어라(생명의 말씀사)

     

    p155 

    자유에 이르는 과정

     

    참된 자유를 향해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요한복음 8장 31,32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신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것이 바로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방법이다. 먼저 믿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붙들고 그 안에 거해야 한다. 그분의 말씀 안에 게속 거한다는 것, 즉 그분의 가르침을 붙든다는 것이 바로 참된 믿음의 증거다.

    예수께서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이는 그들의 믿음이 온전하지 않다는 걸 아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2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예수께서 환전상들을 내쫓아 성전을 정결하게 하셨고, 요한은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은" 사실을 보았다.(요 2:23) 예수께서 그 사실을 축하하거나 "아멘"하고 말씀하셨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요 2:24,25)

    예수님은 저들의 믿음이 구원받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직접 보고 믿었지만, 적극적으로 헌신하지는 않았다.

    이 같은 문제점은 성경의 다른 장면들에서도 발견된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바위 위에 떨어진 씨에 관해 말씀하셨다. 그것은 믿기는 하되 참된 뿌리, 곧 참된 헌신이 결여된 사람들을 나타낸다. 시험과 시련이 닥치면 그들은 이탈하고 만다(눈 8:11-15 참조). 요한복음 12장 42-44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유대교 지도자들에 관한 내용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그들은 믿었지만 고백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중간한 상태였고, 부분적으로는 믿되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즉, 그들은 절반의 믿음만을 갖고 있었다.

    이 모든 사례들이 핵심적으로 가르치는 바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야고보는 이르기를,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고 했다. 나는 어떤 사람에게 수년동안 그리스도와 구원에 관해 말해 왔다. 하지만 그는 늘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모든 것을 믿지만, 그분께 내 삶을 맡길 준비는 되어 있지 않습니다." 분명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고백도 있어야 한고, 헌신도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요8:31)라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야고보는 이르기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약2:17)이라고 한다. 예수께서도 같은 뜻으로 말씀하셨다. 그분은, "내 말에 거함으로써 곧 내 말을 실천하고 내 삶을 본받아 삶으로써, 너희 믿음이 어떠한지를 내게 보이라"라고 말씀하신다. '거한다'는 말은 순조을 의미한다. 참 제자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말씀 안에 '계속 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함에 있어 그릇된 이분법에 빠져든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3년 전에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는데, 오늘밤에는 그분을 주님으로 삼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동기 자체는 훌륭하지만, 그들은 큰 실수를 범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다. 우리가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 되신다.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삶의 주인이신가?"가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는가?"이다.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자처하면서 그분의 말씀과 진리에 대한 사랑은 거의 갖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참 제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어떤 사람들은 내게 "왜 당신은 성경을 가르치는가?"라고 묻는다. 내가 달리 무엇을 하리라고 생각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어디서 진리를 찾고 배우겠는가?

    '제자'라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배우는 사람이다. 참 제가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배우기를 즐겨한다. 참 제자는 단지 듣는 데 그치지 않고 실행에 옮긴다(약1:22 참조) 예수님의 발 앞에 앉을 때, 우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또한 진리를 '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분이 진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유의할 사항이 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사실, 이 약속은 주로 제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그들이 영감을 받아 성경을 기록할 때 성령께서 그들을 인도하고 또 그들에게 능력을 주셨다. 하지만 성령에 관한 예수님의 약속은 모든 시대의 모든 신자들에게 확대된다. 하나님은 성령을 당신의 삶 속에 자리하게 하시며, 성령은 당신을 더욱더 풍성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하나님은 진리를 배우기 위한 교과서도 제공해 주신다. 요한복음 17잘 17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에 있는가? 바로 성경 속에 있다.

    우리에게는 진리의 성육신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우리에게는 보혜사요 인도자이신 성령이 계신다. 또한 하나님의 무흠하고 영감 받은 말씀인 성경이라는 교과서가 있다. 이들 모두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며, 우리가 진리를 발견하기만 하면 우리는 자유롭게 된다(요8:32).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가? 영적 사망의 사슬로부터의 자유, 죄의 감옥으로부터의 자유, 사탄의 결박하는 능력으로부터의 자유, 진리 탐구로부터의 자유, 허무주의나 도피 의식 혹은 음양설 따위에 빠져들어야만 하는 좌절감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어떻게 자유로워지는가?

    ..

    유사 이래로 모든 세대의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과학 기술이 날뒤고 있다. 가장 멋지고, 근사하고, 크고, 위대한 과학 기술이 제공되고 있지만, 우리는 큰 곤경에 처한 상태다. 영화의 기적은 포르노 영화를 산출해냈다. TV와 컴퓨터의 기적은 은밀하게 혹은 드러내놓고 도덕적 타락, 상대주의적인 윤리, 비윤리성 등을 우리 거실로 끌어들였다. 그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는 추세다. 원자 분열의 기적은 인류에게 히로시마, 나가사키, 그리고 세계 황폐화의 위협으로 인류를 옥죄었다.

    이외에도 여기에 나열할 수 있는 사례들은 많다. 하지만 핵심은 분명하다. 과학 기술과 교육이 놀라운 것일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저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학 기술은 진리가 아니다. 사실, 우리는 과학 기술을 조절할 수 있도록 도와줄 진리가 필요하다! 진리는 과학 기술이나 정보나 지식 그 이상이다. 진리는 사실 그 이상이다. 현대인들은 역사 속의 사실들을 가장 잘 활용하지만, 그들에게는 진리가 결여되어 잇다. 어떤 일들에 대한 의미 이해, 즉 그 일의 실제가 무엇이고 그 일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 등이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진리를 알 수 있고 또 그분의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 안에 있는 자신의 진리를 우리에게 주셨다. 그 다음 중요한 단계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만일 우리가 "예, 주님, 나는 주계서 진리를 갖고 계심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진리를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무지와 좌절감에 속박되어 있는 셈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실제로 어느 정도를 터득했는가? 하나님, 인간, 삶, 혹은 죽음에 관한 진리를 발견하려면 성경의 어느 부분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알고 있는가?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 -> 마 5-7장(산상수훈); 고전 7장; 엡 5:21-33

    부모와 자녀, 친구와 원수들의 인간관계 -> 잠 17:17; 27:10,17; 마 5:43,44; 요 15:13

    에 관한 그분의 진리를 알려주는 성경 구절들을 신속하게 찾을 줄 아는가? 성경은 심지어 우리에게 무엇을 먹고 마시며, -> 롬 14:17-21; 고전 10:31

    또 어떻게 살고 생각해야 하는지 -> 눅 6:31; 롬 12; 갈 5:22-26; 잠 12:5; 롬 12:3; 빌 4:6-8

    에 관한 진리까지 제시해 준다. 당신은 이 같은 원칙들을 알려주는 성경 구절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가?

    성경에서 우리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찾을 수 있다. 성경을 통해서 정말 중요한 것,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지닌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삶을 어디에 또 어떻게 헌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으며, 그 결과를 짐작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진리를 알 수 있고, 진리 안에 계속 거할 수 있으며, 진정으로 자유롭게 될 수 있다!

    ...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조절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진리를 그분의 말씀 안에서 그리고 그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그들에게 주셨다. 하지만 성경의 진리를 소유하고 적용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계속해서 그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성경 연구 관련 도서들과 자료들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진리와 그리스도의 교훈에 거할 수 있도록 언제나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p168 

    종종 사람들과 영적 토론을 하다 보면, 관심은 곧 현재 주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데로 모아진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법, 혹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법은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의 주된 관심사다. 

    이 같은 관심사와 관련하여, 나는 종종 혼란을 느낀다. 같은 일을 놓고서, 어떤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어느 칼럼에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조언한 반면에, 다른 칼럼에서는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를 테면,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다. 우리가 날마다 읽는 신문에서도 비정상적이고 비극적인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 혹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을 비난하는 결론으로 끝나는 기사들을 자주 접하지 않는가.

    내가 대화를 나눈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의 뜻이 찾기 힘든 어떤 곳에 잇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줄곧, "나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것을 잃어벼렸나요?"하고 묻는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는 개념은 마치 그것을 잡기 힘든 사냥감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주 공간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자신의 뜻을 초자연적인 수풀 속에 감추어두시고, 우리는 그것을 찾기 위해 일생토록 분주히 다닌다. 그리고 그분은 이따금 우리에게 "조금 더 가까워지고 있다!"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을, 늘 비참하고 성가신 일을 하게 만드시며 흥을 깨는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찾으면, 그건 근사한 일이다. 하지만 설령 찾지 못한다고 해도 걱정할 것이 전혀 없다. 당신은 여전히 천국에 가게 될 것이니 말이다"라고 말한다.

    이 같은 갖가지 생각들을 제쳐둔다고 하더라고, 과연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실제로 그것을 알 수 있을까? 우리가 그것을 밝혀낼 수 있을까? 하나님이 실제로 우리의 삶을 위해 어떤 뜻을 갖고 계실까? 나는 그렇다고 믿으며, 또한 그것을 어딘가에 숨겨두지 않으셨다고 믿는다. 만일 하나님이 뜻을 갖고 계시다면, 그것을 계시하실 것이다.

    ...

    그래서 나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뜻과 관련되는 모든 구절들을 일일이 조사했다. 그 결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다섯가지 기본 원칙을 찾아냈다.

     

    원칙1: 구원 받으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볼 때, 그분이 뜻하시는 것들 중 가장 우선적인 사항은 베드로후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약속이다. "주의 약속은 ...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디모데전서에도 그와 같은 생각이 피력되어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실제로, 구원 사건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이 시작된다. 예수님도 마가복음의 간략한 구절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하신다. 예수님의 모친과 형제들이 그가 가르치고 계신 곳에 도착하여 그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무리가 예수께 고하기를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막 3:32)라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막 3:33)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주위에 앉아 자기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을 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3:34,35)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님의 뜻은 너희가 인가적인 가족의 연분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나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받기를 어느 정도나 원하실까?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2:4,5).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너무도 원하셨기 때문에 자기 아들을 보내어 죽게 하심으로써 자신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셨다.

     

    원칙2: 성령 충만하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뜻을 향한 두 번째 단계는 성령 충만해지는 것이다. 에베소 교인들을 율법주의에 다시 떨어지지 않도록 돕고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기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적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5-18).

    ...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술 취함이라고 하는 부정적이면서도 생생한 예를 활용했다. 알코올이 당신을 통제하도록 내맡기면, 그것이 당신을 사로잡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는 성령께서 당신을 사로잡으실 것이다. 두 경우 모두에서 당신의 '자제력'이 사라지고, 당신의 의지는 다른 무엇 혹은 다른 누구에 의해 대체된다. 두 경우 모두 당신은 내적인 어떤 힘에 완전히 복종하게 된다. 또한 성령의 통제 하에 있을 때는 놀랍게도, 당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어볼 필요조차 없고 단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또한 성령 충만한 삶이란 매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자각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성령 충만한 삶은 대단한 신비가 전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임재를 의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할 사항은, 그리스도를 의식한다는 것이 "난 주께서 여기 계신 줄 압니다... 난 주께서 여기 계신 줄 압니다...난 주께서 여기 계신 줄 압니다!" 하고 중얼거리면서 다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사용한 율법적이고 미신적인 접근법이다. 때로 그들은 "멍들고 피 흘리는 바리새인들"이라 불렸다. 이 같은 명칭은 그들 스스로가 붙인 것으로서, 이성을 바라보는 것을 죄로 여긴 데서 연유했다. 이성이 지나갈 때마다 그들은 눈을 감고서 "난 볼 수 없어... 난 볼 수 없어."하고 중얼거리며 걷다가 벽이나 나무에 부딪히곤 했다.

    성령 충만함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눈을 크게 뜨고서 매일 그리스도의 충만한 임재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어덯게 하면 그분의 임재로 충만해질까? 그것은 그분의 말씀을 연구함으로써 가능해진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께 더욱 초점을 맞출수록, 하나님의 생각이 내 마음속에 더욱더 가득해진다. 하나님의 생각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울수록 나는 더욱더 그분께 순종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한다"9골3:16)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문제에 이르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충만이라고 하는 이 결정적인 단계를 간과한다. 대신 그들은 이 사람과 결혼해야 할 것인지 저 사람과 결혼해야 할 것인지, 이 학교에 들어가야 할 것인지, 저 직업을 택해야 할 것인지, 어떤 종류의 차를 구입해야 하는지 등등의 선택 문제로 곧바로 넘어간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기도를 거듭하면서도 성령의 통제에 자신을 다 맡기지 않는다. 그렇다. 하나님의 뜻은 상실되거나 감추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말씀 속에 분명히 보인다. 구원을 얻으라.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하라!

     

    원칙3: 성결하라

    하나님의 뜻에 대해 그분의 말씀이 가르치는 세 번째 교훈은 우리의 성화, 혹은 보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의 순결과 거룩에 관한 것이다.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살전 4:3-5)

    순결과 거룩은 종종 그리스도인들에게 불편한 용어로 느껴진다. 이것은 자기 의를 내세으며 신성한 체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순결과 거룩은 그리스도이느이 실천적인 삶을 나타내는 두 가지 핵심 부분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3,4절에서 우리는 순결의 몇 가지 원칙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원칙은 매우 분명하다. "음란을 버리고" 성적인 죄악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바울은 성관계 자체를 죄악시했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결혼한 남녀의 성관계는 아름답고 멋진 인간관계이다. 하지만 부도덕한 성관계(간음)란 혼전 성관계로부터 양성애와 동성애에 이르기까지 결혼과 무관한 성적 죄악을 일컫는다.

    ...

    계절이 바귈 때마다 TV프로를 개편하면서 폭력, 가벼운 포르노, 각종 지저분한 내용들이 더 늘어난다.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오늘날 죄악과 탐욕과 부도덕은 갖가지로 포장되어 나타나고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3,4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뜻은 그 어떤 그리스도인도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갖거나 유혹되거나 즐기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순수와 거룩은 신성한 체하거나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매일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부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있어 핵심적이다. 만일 우리가 특정한 물음들은 놓고 하나님의 특별한 대답을 찾고자 애쓰면서도 불순한 삶을 살고 있다면,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준종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의 물음에 답을 주시겠는가?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구원받고, 성령 충만하며, 또한 성결하게 되어 그분의 도구로 사용되기에 적합한 순결하고 거룩한 사람으로 구별되는 것이다.

     

    원칙4: 순종하라

    하나님의 뜻에는 순종이 포함된다. 이는 아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이들에게 조언하고 있는 베드로의 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9벧전 2:13-15)

    베드로는 "법에 순종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베드로의 말을 오라보 이해하고 있는가? 모든 권위에, 모든 법률에 순종해야 하는가? 우리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법정에 끌려나와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과 설교를 중단하라는 지시를 받았던 것과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베드로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

    우리는 세금을 내고, 교통 법규를 지키며, 기타 여러 법규들을 지켜야 한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직업적으로 순복해야 할 것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벧전 2:18). 오늘날엔 노예 상태로 살 필요가 없지만, 우리 중에는 고용주들을 위해 마치 종처럼 성심껏 일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경우에서든 복종하라고 베드로는 말한다. 왜일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잘 선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불경건한 체제속에 살고 있다. 따라서 모범적인 사람으로서 살고자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은 법과 고용주에 대한 순종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존중을 표하는 것도 포함한다.

    ...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인도를 바라면서도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원리를 간과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분명히 드러난 하나님의 뜻, 즉 구원받고, 성령 충만하며, 성결케 되고, 순종하는 것에 순종해야 한다. 그분의 뜻에 순종하면 나머지는 자연히 해결된다.

     

    원칙5: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으라

    ...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 지어다9벧전 4:12-16,19)

    만일 당신이 배우자나 친척이나 목사와 사이가 좋지 않다면, 부분적으로는 당신의 결함 때문일 가능성이 많다.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선을 위한 고난', 즉 불경건한 사회에서 경건하게 살기 때문에 받는 고난이다. 경건하게 살면 상처를 입기 마련이다. 밖에 나가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로 인해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

    고통과 고난을 일부러 찾아다녀서는 안 되지만, 불가피한 핍박이나 고난에 대해서는 기거이 인내해야 한다. 성령과 하나님의 영광이 고난 가운데 우리에게 임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갖가지 관심과 혼란이 난무하지만, 그것이 신비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상실되는 것이 아니며 특정 사람들에게만 알려지도록 숨겨져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배우기 위한 원칙과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하지만 최선의 방법은 다만 성경을 읽고 거기서 하나님의 뜻에 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벧후 3:9)

    그는 우리가 성령 충만하기를 원하신다(엡5:15-18)

    그는 우리가 성결해지기를 원하신다(살전 4:3,4)

    그는 우리가 순종하기를 원하신다(벧전 2:13-15)

    그는 우리가 그를 위해 기꺼이 고난받기를 원하신다(벧전 4:12-19)

     

    이쯤에서 당신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 모든 성경 원칙들은 훌륭하지만 일반적이다. 새 직업을 택하거나, 배우자를 고르거나, 새 차나 집을 구입하거나, 혹은 그 외에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내려야 하는 수많은 구체적인 결단들에 대해서는 어더허게 해야 하는가?"

    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한 가지 원칙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사실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근사하다. 만일 당신이 구원받고, 성령 충만하고, 성결하며, 순종하고, 또한 기꺼이 고난을 감수한다면, 무엇을 원하든 그대로 하라. 원하든 것은 뭐든지? 그렇다. 만일 본 장에서 논의된 다섯 가지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이미' 당신의 바람과 소원을 통제하고 계신다. 그분은 "자시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빌 2:13) 하신다. 만일 당신이 "여호와를 기뻐하면 "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시37:4). 왜냐하면 그 소원은 바로 당신을 위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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