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재

바가반이 친히 말씀하신 가르침

LifenLight 2025. 1. 8.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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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eachings of Bhagavan Sri Ramana Maharshi in His Own Words> by Arthur Osborne

진아의 지복은 항상 그대의 것이며, 만약 열심히 추구하면 그대는 그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대의 불행의 원인은 그대 바깥의 삶에 있지 않고, 에고로서의 그대 안에 있습니다. 그대는 자기 자신에게 제한을 가해 놓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헛된 애를 쓰고 있습니다. 모든 불행은 에고 때문입니다. 그것과 함께 모든 괴로움이 찾아옵니다. 사실은 그대의 안에 있는 불행의 원인을, 삶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두어봤자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그대 자신의 밖에 있는 것들로부터 그대가 무슨 행복을 얻겠습니까? 설사 얻는다 해도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만양 그대가 에고를 부인하고 무시하여 그것을 고사시켜 버리면 그대는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에고를 받아들이면, 그것은 그대에게 온갖 제한을 가하고 그대로 하여금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헛된 노력을 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진정으로 그대 자신인 진아가 되는 것만이, 항상 그대의 것인 그 지복을 깨닫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만약 우리가 사랑하는 어떤 사람이 죽으면, 계속 살아있는 사람에게 슬픔이 일어납니다. 슬픔을 없애는 길은 계속 살아 있지 않는 것입니다. '슬퍼하는 자'를 죽이십시오. 그러면 슬퍼할 누가 남아있겠습니까? 에고가 죽어야 합니다. 그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그대가 말하는 두 가지 방법은 동일한 것입니다.모두가 하나의 진아라는 것을 깨달으면, 사랑하거나 미워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Q: 고통이 왜 존재해야 합니까?
A: 만약 아무 고통도 없다면,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런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진아에 대한 탐구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Q: 그러면 모든 고통은 좋은 것입니까?
A: 그렇습니다. 행복이 무엇입니까? 건강하고 잘 생긴 육체라든가, 매 끼니 식사를 잘 하는 그런 것입니까? 건강한 황제라 할지라도 끝없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고통은 '나는 육체다' 하는 거짓된 관념에 기인합니다. 이것을 제거하는 것이 지知입니다.

기도는 믿음의 부족을 보여주는 징표일 수 있는데, 바가반은 보통 청원이라는 의미에서의 기도는 권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에게 기도하면서 이렇게 끝맺습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Thy will be done). 만약 그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면, 기도는 왜 합니까? 신의 뜻이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관철될 것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개인들은 자기 마음대로 행위할 수 없습니다. 신의 뜻이 가진 힘을 인정하고 침묵을 지키십시오. 신은 모든 사람을 돌보고 있습니다. 그가 일체를 창조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많은 사람을 돌보면서 그대를 빠뜨리겠습니까? 그에게 그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돌봐줄 것입니다.

애씀없고 선택 없는 자각은 우리의 참된 성품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상태를 성취하여 그 안에 안주한다면, 그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아무 노력 없이는, 즉 의도적인 명상의 노력 없이는 그 상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오래된 원습(타고난 습)들은 모둔 마음을 외부의 대상으로 향하게 만듭니다. 그런 모든 생각을 놓아버리고 마음을 내면으로 향하게 해야 하는데,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노력을 요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니고의 침묵 상태를 성취한 것을 발견하다 해도, 그는 전생에 이미 그에 필요한 노력을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애씀 없고 선택 없는 자각은 의도적인 명상을 한 뒤에야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명상에서는 그대의 마음이 가장 많이 끌리는 어떤 형상도 대상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생각을 물리치는 데 어떤 ㄱㅅ이 도움이 되는지를 살펴본 다음, 그것을 그대의 명상에 채용하십시오.
에고가 지속되는 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에고가 사라지면 행위들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대가 있기 때문에 세계가 있습니다. 그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그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자가 고려할 필요가 없는 질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온갖 질문들에 에너지를 낭비합니다. 먼저 그대 자신의 이면에 있는 진리를 발견하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그대 자신도 그 일부인 세계의 이면에 있는 진리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될 것입니다.

Q: 어떤 특정한 사람이 능력 있는 스승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A: 그대가 그의 친존에서 느끼는 마음의 평안과 그에게서 그대가 느끼는 존경심에 의해서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는 자기탐구만큼 효과적인 수단이 없습니다. 다른 수단에 의해서도 마음이 가라앉기는 하겠지만, 그것은 외관상으로만 그럴 뿐이고 다시 일어납니다. 이것이 직접적인 방법입니다. 다른 모든 방법은 에고를 유지하면서 수행하는 것이며, 따라서 많은 의문이 일어나고 궁극적인 의문은 마지막까지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에서는 그 마지막 의문이 유일한 의문이며, 바로 처음부터 그것을 제기합니다.
자기탐구는 그대로 하여금 아직 진아를 개닫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장애들을 제거함으로써 곧바로 진아 깨달음에 이르게 합니다.

자기탐구가 첫째가는 그리고 가장 중요한 단계입니다. 탐구가 자동적으로 되면, 부와 명예, 안락과 쾌락 등에 대한 무관심이 따라옵니다. '나'라는 생각을 그 '나'의 근원인 심장까지 추적해야 하는데, 이 심장이 최종 목표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구도자가 기질상 자기 탐구에 맞지 않는다면, 그는 헌신을 계발해야 합니다. 그 대상은 신일 수도 있고, 스승일 수도 있고, 인류 일반이나 윤리 법칙, 혹은 심지어 아름다움이라는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 중 하나가 그 개인을 장악하게 되면, 다른 집착들은 약해져서 무욕이 계발됩니다. 그 헌신의 대상에 대한 집착이 자라나서 마침내 그것이 그를 완전히 지배하게 되고, 그와 함께 일념집중이 자라는데, 환영과 직접적인 방편들이 수반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가 탐구에도 헌신에도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면, 호흡 제어에 의해 평온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요가의 길입니다. 만약 한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그의 모든 관심은 목숨을 건져야 한다는 하나의 초점에 집중됩니다 .만약 호흡이 제어되면 마음은 그것이 좋아하는 것, 즉 바깥의 대상들에게로 달려 나갈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호흡이 제어되어 있는 한, 마음의 평안이 있습니다. 그의 모든 주의가 호흡에 쏠려 있기 때문에, 다른 관심들은 배제됩니다. 또한 어떤 정욕도 불규칙한 호흡을 가져옵니다. 갑작스런 기쁨의 분출은 사실 슬픔의 분출만큼이나 고통스러운데, 둘 다 숨을 헐떡이게 됩니다. 참된 평안이 행복이며, 쾌락은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만약 그 구도자가 기질상 앞의 두 가지 방법에 맞지 않고 나이나 건강 때문에 세 번째 방법도 택하기 어려우면, 행위의 길, 즉 선행과 사회적 봉사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의 고귀한 품성이 더욱 계발되고, 그는 자신의 행위에서 개인적인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의 에고는 앞으로 덜 나서게 되고 그 좋은 면이 발전될 수 있게 됩니다. 이리하여 그도 때가 되면 앞의 세 길 중의 하나를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아니면 행위의 길만으로도 (진리에 대한) 그의 직관(깨달음)이 계발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참된 성품은 해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자유로운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속박되어 있다고 상상하면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힘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 상태에 도달할 때에야 이해됩니다. 그때는, 우리가 항상 그것이었고 지금도 그것인 어떤 것에 도달하기 위해 미친 듯이 발버둥쳤다는 사실에 놀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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